‘한국은 인터넷의 중심에 섰을까.’ 아니, 아직 변방에 있다. 매우 앞선 정보기술 강국이되 인터넷에서 발휘하는 정치력은 어린아이 종종걸음에 불과하다. 한국이 인터넷 변방에서 중심으로 나아가려 하듯, 각국 정부와 민간 전문가들이 브뤼셀·시드니·워싱턴 등 세계 곳곳의 국제인터넷주소관리기구(ICANN:Internet Corporation for Assigned Names and Numbers) 사무실에서 격돌하고 있다. 특히 ICANN을 계속 품 안에 두려는 미국과 ‘국제연합(UN) 인터넷 거버넌스 포럼’을 내세워 주도권을 뺏으려는 이해당사국 간 갈등이 날로 뜨거워지는 추세다. 흡사 복마전 같은 인터넷 주도권 다툼을 뚫고 누가 중심에 설 것인가.
◇UN 인터넷 거버넌스 포럼의 도전=정부·기업·시민단체 등 여러 이해당사자는 지난 2005년 ‘세계 정보화사회 정상회의’ 이후 ‘UN 인터넷 거버넌스 포럼’을 실험하고 있다. 지난 3년간 비정부기구를 중심으로 포럼의 어젠다가 결정됐고, 이해당사자들끼리 정보를 교환하는 장으로 운영됐다. 포럼이 ICANN의 대안적 모델이 될 것으로 기대했던 각국 정부에 여간 실망스러운 상황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각국은 내년 포럼을 앞두고 다시 한 번 인터넷 거버넌스 포럼의 역할과 미래에 합의해야 할 처지다. 따라서 올 11월 이집트 카이로에서 열릴 포럼에 시선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이 포럼에서 합의된 내용은 UN 총회에 전달된 뒤 반기문 UN 사무총장이 총회의 결정에 따라 ‘인터넷 거버넌스 포럼’의 미래와 로드맵을 제시할 예정이다.
UN의 이런 움직임은 워싱턴에서 촉발됐다. 미국 상무부가 국제적 합의 없이 국제 인터넷 인프라의 관리를 ICANN에 독임해 갈등을 낳았던 것. 특히 미 정부는 1998년 11월 ICANN과 인터넷 인프라 관리 계약을 맺은 뒤 “적당한 시기가 되면 (ICANN에서) 손을 떼겠다”고 국제 사회에 언약한 바 있지만, 무려 일곱 번에 걸쳐 계약을 연장했다. 최근에는 미 상원이 ‘미국의 ICANN 영구 감독체제로의 전환’을 주장하기도 했다.
지난 1일, 다행히 “ICANN을 독립시키겠다”는 미 정부의 약속이 국제사회가 참여할 수 있는 ‘의무 협약(AoC:Affirmation of Commitments)’으로 얼마간 틀이 교체됐다. 국제 인터넷 인프라 관리 주체를 놓고 새로운 논의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비비안 레딩 유럽위원회(EC) 집행위원은 이러한 변화에 대해 “도메인 이름과 주소와 관련한 ICANN의 결정이 더 믿을 만한 것으로 기대할 수 있게 됐다”며 ‘AoC’를 긍정적으로 평가했으되, 미국 외 다른 국가의 실질적인 역할을 기대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레딩은 지난 5월에도 “G12가 공동으로 국제 인터넷 인프라를 관리하자”고 제안한 바 있다.
◇격돌하는 국가 간 이해=인터넷 인프라 관리 주도권 경쟁이 이렇듯 뜨거운 가운데 오는 24일부터 30일까지 이레 동안 제36차 ICANN 회의가 서울에서 열린다. 한국은 이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인터넷 거버넌스 논의에 참여해 정보기술 강국 지위를 더욱 높이고, 국제 인터넷 인프라 관리 주체의 한 축으로 떠오르기를 바라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무엇보다 제국(미국)의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어느 누구도 “해가 너무 뜨겁다”고 말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미국이 ‘인터넷을 만들었다’는 논리하에 국제 인프라를 독점 관리하기 때문이다. 제네바에 있는 국제전기통신연합(ITU)을 중심으로 국제 인터넷 인프라 관리에 대한 논의를 재개하려는 노력이 꾸준히 전개된 뒤에야 미국이 펼쳐놓은 밥상 앞에서 묵묵히 고개만 떨구던 각국 정부의 불만이 하나로 모여 표출되기 시작했다.
중국·브라질·인도·아랍 등 제3세계 정부들이 총대를 메고 나섰고, 미국이 단독 행사하는 인터넷 관리 체제를 “UN을 중심으로 바꾸자”는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당황한 미국 정부는 내년까지 한시적으로 UN 사무총장이 개최하는 ‘인터넷 거버넌스 포럼’에 합의했다. 변화가 시작된 것이다.
◇서울에서 새 출발=서울회의에서는 ‘국가코드를 중심으로 하는 다국어 도메인 도입 정책’이 논의된다. 지난 2000년부터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이 요구했으되 정치적 이유로 뚜렷한 변화 없이 10년이나 흘렀다. 또 한국 기업들이 아직 적극적으로 관여하지 않는 새로운 ‘일반 최상위 도메인’ 도입 여부도 정책적 논의의 초점이 될 것이다.
미국 정부가 제시한 ‘AoC’라는 틀은 여러 국가에 실질적 결정권을 행사할 기회를 주겠지만, 이른바 ‘국제 심사 패널(International Review Panel)’의 실현을 두고 이전투구가 일어날 전망이다. ICANN에 있는 ‘정부자문위원회(GAC)’의 위상을 강화하겠다는 미국의 약속이 얼마나 현실화될지도 의문이다. 미국이 여전히 정부가 아니라 민간이 주도하는 ‘민관 합동 결정권(multi-stakeholder principle)’과 기업 중심의 ‘운영 및 결정권(private sector leadership)’을 아주 중요한 룰로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ICANN의 최종 의사는 인선위원회(nominating committee)가 선출한 이사진이 결정한다. 이들과 이들에 가까운 측근들(이너서클)이 정책을 좌지우지하는 구조다. 경상현 옛 정보통신부 장관이 ICANN 이사를 역임한 바 있으나, ICANN 이너서클이 이사를 추천하는 현 체계에서는 이사진을 배출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렇듯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 대부분은 ICANN 주변을 겉돌았다. 한쪽에서는 미 정부가 주도하는 굿을 본다는 심정으로, 한쪽에서는 우리도 참여할 수 있는 국제 정세의 적당한 시기가 오리라는 기대로, 한쪽에서는 우리만 묵묵히 잘하면 된다는 마음으로 부지런히 광대역통신망(브로드밴드)을 깔고, 세계에 정보기술을 팔았다.
ITU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내놓는 국가 간 비교에서 한국은 단연 돋보이는 초고속 인터넷 강국이다. 하지만 경이로울 정도의 최고 인터넷 인프라를 구축한 한국 정부의 의욕이 국제 IT정책 무대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분명 시간이 걸리겠지만, 한국 정부가 보다 신속하게 국제 인터넷 인프라를 관리하는 주체로 참여해야 할 시점이 됐다. 특히 ‘ICANN 서울 36’이 한국에 어떤 기회를 열어줄지 주목된다.
박윤정 델프트공대(네덜란드) 인프라경제학과 교수 Y.J.Park@tudelft.n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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