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뜨거운 사막 한가운데서 서버 들고 다니는 사람은 저밖에 없었습니다. 요즘 들어 해외 건설 현장에 IT 매니저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지만 저는 30년 전부터 해왔던 일이죠.”
현대건설 그룹의 IT 기획 및 운영을 총괄하고 있는 이정헌 현대씨엔아이 대표의 방에 들어서면 한쪽 벽면에 낡은 사진 한 장이 커다랗게 걸려 있다. 1982년도 싱가포르 마리나센터호텔 건설 현장 전경이다. 이 대표는 이곳 현장 한켠에서 2년 넘게 현장 지원을 위한 전산 시스템을 만들고 운영했다. 해외 현장 IT 매니저 1세대였던 셈이다.
그가 건설IT 역사의 산증인으로 통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1979년 현대건설에 입사한 이후 지금까지 30년 넘게 건설 분야의 정보화를 위해 애써왔다. 사우디아라비아, 필리핀, 말레이시아 등 현대건설의 대형 해외 공사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 지원시스템을 구축했다. 당시 대형 해외 건설사업의 경우 전산으로 처리된 공정관리 증빙자료를 제출해야만 시공사로부터 대금을 받을 수 있었다. 때문에 전산 시스템은 국내보다도 해외 현장에서 오히려 더 필수였다.
이 대표는 “서투른 영어 실력으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기술 교육을 받아가며 모든 문제를 해결해 나갔다”며 “새벽 6시 출근해서 심야에 퇴근하는 바쁜 생활에 지치기도 했지만 정말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던 시기”라고 회고한다.
최근 국내 건설사들이 대규모 해외플랜트 공사 사업을 잇달아 수주하는 등 해외 비즈니스가 늘어나면서 해외 프로젝트의 IT 지원 업무를 총괄하는 전문가의 필요성이 더욱 강조되고 있다. 현대건설은 현재 10여명 이상의 IT 전문가를 해외 현장에 파견하고 있다. 이 대표가 이미 30년 전부터 건설 현장에서 IT매니저의 필요성을 절감해 왔기 때문이다. 해외 파견 IT 인력을 늘이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대표의 요즘 고민은 직원들의 기술적인 역량과 비즈니스 이해도를 높여 대규모 해외 현장에서 전 시스템을 다룰 수 있을 정도의 인재를 육성하는 데 집중돼 있다.
한동안 현대건설의 IT부서는 ‘대리 양성소’로 불릴 정도로 직원들의 이직률이 높았다. 한해에 15명이 한꺼번에 회사를 떠나기도 했다. 직원들의 업무 만족도가 높지 않았다는 의미도 된다. 2년 전 이 대표가 현대씨엔아이의 초대 대표를 맡으면서부터 가장 중시여긴 것이 직원들의 역량 강화다.
이 대표는 “직원들의 역량이 곧 회사의 경쟁력과 직결된다”며 “현대씨엔아이 설립 이후 시스템운영(SM)과 시스템통합(SI) 인력을 구분해 담당 업무를 세분화·전문화시킴으로써 직원들의 역량과 업무 만족도를 동시에 높일 수 있었다”고 말했다.
현대씨엔아이를 건설 분야의 최고 IT서비스 업체로 발전시켜 나가겠다는 게 이 대표의 장기적인 목표다. 숫자상으로는 벌써 출범 2년만에 매출 목표를 3배 이상 초과 달성하는 등 괄목할만한 성과를 보이고 있다. 내용상으로는 현대건설 그룹의 주요 기간시스템을 구축한 경험을 바탕으로 ERP 컨설팅 등 대외 시스템통합(SI)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외부 사업의 비중을 30%까지 끌어 올렸다. 향후 외부 사업 비중을 50%이상으로 확대해 나간다는 방침이다.
현재로서는 현대건설의 IT 아웃소싱 사업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만큼 핵심 과제들은 대부분 현대건설의 비즈니스 전략을 뒷받침하는 시스템 구축 작업이다.
현대씨엔아이는 올해 전사적자원관리(ERP) 고도화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다. 경영 관리자들만을 위한 ERP 시스템이 아니라 기술자들도 함께 자료를 공유해서 활용할 수 있도록 개선할 계획이다.
그는 또 ERP 시스템과 건설현장종합관리시스템(H-PMS)의 통합도 추진하고 있다. ERP 패키지 특성상 사용자환경(UI) 측면에서 편이성이 다소 떨어지는 부분을 H-PMS를 통해 보완하고자 추진하는 것이다. H-PMS는 국내외 현장에서 수행되는 공정관리와 품질관리, 안전환경관리 업무 프로세스 등을 표준화한 시스템이다.
이 대표는 “현재 부분적으로 ERP 프로그램을 H-PMS에 탑재해 운영하고 있는데 사용자들의 만족도가 높다”며 “자료 조회용으로 사용하는 ERP 프로그램을 웹으로 개발해 PMS 데이터와의 연계를 강화해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가 현대건설의 ERP 시스템에 갖는 애정은 남다르다. 1999년 업계 최초로 전 건설현장에 ERP 시스템 도입을 진두지휘했던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당시 ERP는 제조업체의 비즈니스 필요에서 파생된 만큼 분양 관리 등 건설업계의 핵심 업무를 지원하지 못했기에 건설업계가 ERP 도입을 꺼리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이 대표는 글로벌 기업 환경으로 거듭나기 위해선 ERP 도입이 필수적이라고 판단, 경영진의 동의를 이끌어내 저돌적으로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본사와 430개 전 현장의 핵심 업무에 빅뱅방식으로 ERP를 구축, 적용했고 2002년 4월부터는 40개국 15개 지사와 64개 현장으로 ERP 시스템을 확대해 글로벌 통합 정보시스템을 구축해 왔다.
이 대표는 ERP를 통한 가장 큰 이점으로 경영 투명성 제고를 꼽았다. 수 백개의 현장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정보들을 실시간 확인, 활용할 수 있고 무엇보다 각 업무별 프로세스를 개선하는 데도 ERP가 큰 역할을 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 대표는 “제조업의 표준 프로세스를 그대로 적용했더니 기대 이상의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며 “두바이 현장에서 점심 식사한 내역을 서울 본사 회계부에서 곧바로 확인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대표가 한 분야에서 오랜 기간 한 우물을 파온 내공의 원천은 도전정신이다. ERP 시스템의 도입은 이런 그의 도전정신의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이 대표의 도전정신은 통합커뮤니케이션(UC) 기반의 협업 환경을 구축하는 데도 톡톡히 발휘되고 있다.
올해 초 현대씨엔아이는 불과 2주의 기간 동안 200여개의 영상회의 시스템을 전 현장과 지사에 설치해 업계를 놀라게 했다. 아직 국내에 유례가 없는 최단 기간 최대 규모의 영상 시스템 설치 프로젝트였다. 현대건설은 이 영상회의 시스템을 사용해 사업 실적 회의와 현장 진행 상황 등을 진행하고 있다.
영상회의에서 멈추지 않고 향후 현장의 CCTV와 영상회의 시스템을 연결해 영상회의 중에도 현장의 생생한 공사 진척 상황을 전달할 수 있도록 한다는 계획이다. 또 회의실뿐만 아니라 직원 PC에서도 영상회의를 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확대 적용할 계획이다.
이 대표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도전은 언제나 긍정적인 결과를 낳는다”며 “앞으로 현대씨엔아이는 국내 건설업계의 정보화 시스템 수준을 보다 발전시키는 데 기여하고 나아가 국내 건설업의 발전을 도모할 수 있도록 성장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정헌 대표는
서울 대광고등학교 야구부 출신이었던 그는 고등학교 2학년때 야구선수의 꿈을 접고 학업에 매진해 고려대학교 산업공학과에 입학했다. 1973년에 졸업한 이후 서강대학교 대학원에서 정보처리학 석사과정을 마쳤고 1979년 현대건설에 입사했다. 그는 현대건설에서 1993년까지 전산실과 해외현장의 전산 시스템 운영을 담당했다. 이후 현대정보기술의 건설IT실 개발운영팀장과 전산실장을 거쳐 2001년 현대건설의 최고정보책임자(CIO)로 임명됐다. 지난 2007년부터는 현대건설 그룹의 IT 아웃소싱 자회사인 현대씨엔아이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성현희기자 sunghh@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