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품소재 세계 일류화를 위해](2부)소재 ②화학- 첨단 특수소재로 질적 성장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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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 살아보자’가 화두였던 시절, 국내 (석유)화학 산업은 개발 경제의 상징이었다. 지난 1970년대 초 정부 주도로 울산 지역에 석유화학단지가 설립되면서 태동한 우리나라 화학소재 산업은 지난 40년 가까운 시간 동안 눈부신 성장을 거듭해왔다. 지난 1980년대 말부터 생산 능력을 대폭 늘리면서 본격적인 도약기를 맞았고, 지금은 우리나라 제조업의 중추로 자리 잡았다. 지난 2007년 기준 국내 화학 관련 산업의 출하액은 212조원으로 전체 제조업의 21.5%를 차지했다. 이 가운데 고분자·정밀화학 등 첨단 화학소재 산업만 따져도 연 생산액 80조원을 웃돈다. 현재 화학소재 산업의 고용 인력도 전체 제조업의 10%가 넘는 31만여명이다. 100년이 넘는 업력을 자랑하는 해외 선진국들과 비교하면, 기초 자원과 기술 하나 없이 불과 40년도 채 안돼 일궈낸 성과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다.

 하지만 ‘양적 팽창’을 향해 앞만 보며 달려왔던 국내 화학소재 산업은 지금 질적 변신을 위한 중대 기로에 놓였다. 적어도 외형에서는 국가 주력산업으로 불릴 만하나 속을 들여다보면 부실하기 짝이 없다. 이제 고부가가치 첨단 특수 화학소재 산업에 국가적인 역량을 집중하지 않고서는 조만간 위기가 현실로 닥칠 수 있다는 한결같은 지적이다. 특히 화학소재 시장에서 ‘극일’에 성공하지 못하면 반도체·디스플레이·자동차·기계 등 우리나라 주력 기간 산업들도 두고두고 위협이 된다는 게 공통된 목소리다.

 ◇범용의 한계=국내 화학소재 업계가 대부분 범용 제품에 치우쳐 있다는 점이 대표적인 예다. 에틸렌 생산능력과 기술력은 세계 5위권이지만 주력은 범용 플라스틱·정밀화학 제품이다. 최대 수요 시장이자 우리나라 주력 기간산업인 전자·정보·에너지·정밀기계 등에 소요되는 고기능성 특수 화학소재 시장에서는 일본 등 선진국에 비해 한참 뒤처진 실정이다. 오랜 기간 원천 기술을 보유해 온 일본이 초정밀 합성·가공 기술과 특수 화학소재 기술에 주력하며 앞서 나가고 있는 반면에 우리나라는 ‘양산’에만 치중해온 탓이다. 단적인 예로 우리나라가 세계 1위인 LCD·PDP·OLED 등 디스플레이 시장에서 핵심 화학소재의 60% 이상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LCD용 화학소재 가운데 액정·폴리비닐알콜(PVA)·트리아세테이트셀룰로스(TAC)필름 등은 전량 수입하고 있다. 원유를 비롯해 자원 빈국인 우리나라가 범용 제품에 머무르다 보니, 유가와 경기 동향에 늘상 시달리는 것은 물론이고 최근에는 중국·중동의 거센 추격에 위협받는 실정이다. 수익성과 동시에 성장 한계에도 봉착한 것이다. 지난 2007년 기준 전 세계 화학기업 가운데 LG화학이 99억달러로 매출액 순위 겨우 28위에 올린 것이 고작이다. 1위인 독일 바스프(650억달러)와 비교하면 6분의 1에도 못 미친다. 후발주자인 중국의 시노펙이 306억달러로 6위, 사우디의 사빅이 292억달러로 7위, 심지어 대만의 포모사가 265억달러로 10위에 오른 것과 비교하면 초라한 수준이다.

 ◇극일 없으면 전방산업군도 위협=첨단 특수 화학소재는 그 자체로도 대표적인 대일 무역역조의 주범이다. 지난 2007년 기준 대일 수입액 상위 100대 품목 가운데 LCD용 TAC필름을 비롯해 무려 24개 품목이 화학소재다. 하지만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당장 우리나라 주력 기간산업인 정보전자·에너지·정밀기계 등 전방 산업이 세계 시장 주도권을 이어가는 데 심각한 위협 요인이다. 게다가 국가 신성장동력 산업으로 꼽히는 차세대 반도체·디스플레이·전지·자동차·이동통신·로봇·바이오·환경·에너지 등 미래 산업군 전반에 걸쳐 화학소재 기술은 핵심 기반이다. 국내 화학소재 산업의 취약한 구조에 우려감이 증폭되는 이유다.

 첨단 전자·자동차에 들어가는 고분자·정밀화학 소재에서 일본의 기술력과 시장 지배력은 무서울 정도다. 자국 내 전자·자동차 산업의 부흥과 발맞춰 오래전부터 선행 기술력을 선점, 한국을 비롯한 후발 주자들을 항상 따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교육과학기술부에 따르면 현재 우리나라의 고분자 중합 및 공정기술은 일본 대비 70% 수준이지만 특수 고분자 기술은 40% 이하다. 정밀화학 분야에서도 전자산업용 정밀화학 소재 기술은 일본에 비해 84% 수준에 그친다. 우리가 엄청난 공을 들여 제품 개발에 성공하면, 일본은 다시 차세대 제품을 내놓고 고부가가치 시장으로 옮겨가는 ‘악순환’이 현실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기존 양산 제품의 가격은 내려가게 마련이고, 기업 측에서는 연구개발을 주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나마도 막대한 연구개발 부담을 감당할 수 있는 대기업 계열 화학소재 업체들에만 해당되는 얘기다. 허완수 숭실대 교수는 “일본의 화학소재 업체들이 선행 기술력을 앞세워 삼성·LG·현대차 등 국내 수요기업을 되레 압박하는 실정”이라며 “결국 소재 기술 때문에 여타 전방 산업군 자체가 계속 위협받을 수 있다는 점이 더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국가적인 총력전 펼쳐야=비록 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고기능 특수 화학소재 산업 육성에 범국가적인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는 목소리다. 특히 최근 모든 산업군이 친환경과 에너지를 화두 삼아 변신하고 있는 지금, 국내 화학소재 산업의 재도약을 위한 전기를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성구 한국화학연구원 센터장은 “지금까지 단기 실적이나 연구결과를 내는 데만 급급했다면 보다 중장기적 관점에서 미래 세계 시장을 선점할 수 있는 소재를 개발하는 데 전력을 모아야 한다”면서 “실패를 감수하면서도 과감한 연구개발 투자가 이뤄질 수 있도록 산학연의 힘을 합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화학소재 기업과 수요처인 첨단 부품·소자 업체들 간의 강력한 공조 체계는 가장 현실적인 대안으로 꼽힌다. 이범진 제일모직 연구원은 “과거 일본 기업들만 할 수 있다는 고정 관념이 서서히 약화되고 업계 전반적으로 국산화 노력이 강해진 것은 사실”이라며 “그러나 우리가 극일을 하려면 최소한 일본 소재 기업들과 동등한 수준에 올라올 때까지 수요 기업들의 의지가 더 절실한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서한기자 hseo@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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