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몇 년간 정보기술(IT)업계의 화두로 부상하는 게 ‘융합’이다. 융합이 시너지효과(상승작용)를 내리라는 기대감에 정부는 신조어를 끊임없이 생산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IT융합의 핵심으로 떠오른 융합 소프트웨어(SW)와 보안사고가 터질 때만 주목받는 융합보안산업이다.
지식경제부는 그 일환으로 ‘임베디드SW 융합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자동차·건설·의료·조선 등 우리나라가 강점을 지닌 전통산업과 SW를 융합하면 큰 부가가치를 낼 수 있다는 판단 아래, 제품 상용화 선도 프로젝트와 융합 시제품 제작 지원 사업을 하고 있다. 제품 상용화 선도 프로젝트는 시장성과 수입대체효과가 기대되는 제조업 부문을 대상으로 과제당 개발비용의 50% 범위에서 최장 2년, 연간 최대 5억원을 지원하는 것이다.
지경부는 또 지난해 발표한 ‘시큐어링 날리지 코리아(Securing Knowledge Korea) 2013’을 통해 지식정보보안산업을 오는 2013년까지 18조4000억원 규모로 육성한다고 밝혔다. 이 중 ‘융합보안’ 등 원천 기술 연구개발에 총 1500억원을 투자할 예정이다.
◇3000억달러의 융합SW시장…성패는 ‘과정’에서 비롯=SW업계 한 전문가는 “냉정하게 따져봤을 때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임베디드SW 융합프로젝트는 결코 성공할 수 없는 사업”이라며 “정부가 당장 상용화를 요구하는 임베디드SW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원천 기술을 개발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임베디드SW가 기존 SW와는 전혀 다른 분야로 긴 호흡을 갖고 전문인력을 양성하는 게 우선”이라고 덧붙였다.
정보보호업계도 비슷한 의견을 내놓았다. 정보보호업계 한 전문가는 “기초적인 정보보안인력 양성계획도 추상적인 상황에서 인력난에 시달리는 정보보호업계로서는 융합보안이라는 단어가 공허하게 들린다”고 단언했다.
실제로 정부의 SW융합 추진계획에는 전문인력 양성계획이 없다. 이 때문에 정부의 ‘SW융합 프로젝트’는 단순한 어젠다로 전락하리라는 다소 성급한 추측도 제기된다. 그러나 포기는 이르다.
가트너의 조사에 따르면 세계 임베디드 시스템 생산액은 1조6000억달러로 추정되며 이 중 임베디드 SW생산액은 1500억달러로 임베디드 시스템 생산액 대비 9.0%를 차지하고 있다.
인터넷진흥원이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올해 전 세계 보안 시장 규모는 물리보안(871억달러), 융합보안(847억달러), 정보보안(545억달러) 순이지만 내년에는 융합보안의 시장규모가 1068억달러로 968억달러의 물리보안시장을 근소하게 추월한다. 2013년에는 융합보안 부문이 1408억달러로 물리보안은 1290억달러로 격차가 더 커진다.
임베디드SW와 융합보안을 합쳐 3000억달러 이상의 시장이 기대되는 셈이다. 한국이 이 거대한 시장에 발을 들여놓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를 이끌어갈 인재 양성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융합의 기본은 기초=전문가들은 SW융합전문인력을 양성하려면 근본적으로 SW의 기초를 탄탄하게 쌓는 작업을 선행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그러나 국내 초·중·고 컴퓨터 교육은 양과 질 모두 낙후됐다. SW 경쟁력 강화 추진위원회에 따르면, 중학생의 44%, 고등학생의 23%만이 컴퓨터 교육을 받는다. 교육내용도 기본적인 인터넷활용법, 문서작성 등 기능 습득에 그쳤다. 내년부터 활용이 아니라 알고리듬이나 프로그래밍 등의 컴퓨터 기초 과학 중심으로 교과 과정을 개편한다고 하지만, 전문인력이 없으니 전문교사가 있을 리 만무하다.
실제로 한 외국계 조사 기관의 자료에 따르면 한국은 컴퓨터 활용도는 높으나 프로그램 창작 등 컴퓨터 과학능력은 저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보보호부문은 상황이 더 심각하다. 초·중·고교에 관련 교육이 아예 없는 것은 물론이고 전국적으로 학사나 석사과정으로 정보보호학을 전공할 수 있는 곳이 20여개에 불과하다. 그마저도 순수 정보보호학 전공은 절반이 채 안 되며, 대부분 소프트웨어학부, 컴퓨터공학부, 정보통신공학부 밑에 속해 있다. 이 때문에 전문인력도 턱없이 부족하다. 지난해 서갑원 민주당 의원실에 따르면 한 해 국내에서 해킹이나 정보유출로 인한 정보보호 피해액은 3조원에 달하지만 국내 유일의 국가공인 ‘정보보호전문가(SIS)’는 고작 346명밖에 없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반면에 SW선진국은 사정이 다르다. 이들은 컴퓨터 교육을 하나의 기초과학으로 인식해 알고리듬, 프로그래밍 등을 실시하고 있다. 인도는 초등학교 2학년부터 교육용 프로그래밍 언어(LOGO) 교육을 하며, 이스라엘은 컴퓨터 과학을 필수교과로 지정하고 프로그래밍 교육을 강화하고 있다. 일본도 정보를 고등학교 필수과목으로 편성하고 대학 입시과목에 포함했다.
◇융합전문인력 양성 백년대계를 수립하라=‘기초교육’이라는 반석에서 융합을 시도해야 한다. 대학 교육과정 개편이 시급하다. SW업계 한 전문가는 “융합 산업 환경에는 다양한 도메인 지식을 겸비한 인력이 필수지만 현재 국내 대학의 현황은 그러하지 못하다”면서 “자동차는 자동차학과가, SW는 전산학과나 컴퓨터공학과가 있어 각각 해당 산업 영역에 대한 전문지식을 배양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융합 산업현장에서는 특정 산업의 영역이 아닌 다양한 산업에 지식을 겸비한 멀티 전문가를 요구하는만큼 학제 간 다양한 교육을 할 수 있게 학제 개편은 물론이고 융합·실용 분야 교수인력의 채용수요를 늘려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이는 이공계 회피 현상을 줄일 수 있는 대안으로도 주목받는다. 한국SW진흥원 관계자는 “SW 관련 학과에 지원율이 감소하고 있는 상황에서 교육 과정을 융합 환경에 맞게 개편하면 우수 인력 확보 돌파구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인력이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일터를 만들어줘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상대적으로 우수한 인력이 몰리는 수도권 지역에 보다 많은 정보보호학과를 개설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고용계약형 석사과정을 확대하는 것도 대안이다. 지경부는 지난 2월 기업수요에 맞는 고급 정보보호인력을 2013년까지 300명 양성하는 것을 목표로 지식정보보안 고용계약형 석사과정을 지원한다고 밝힌 바 있으나, 보다 규모를 늘려야 한다는 것이다.
재교육 기회도 늘려야 한다. 한국SW기술진흥협회가 연내 융합SW전문인력 등 연간 2500여명의 SW인력을 양성할 수 있는 기술훈련센터를 설립한다고 밝힌 데 시선이 쏠리는 이유다. 특히 센터 내부에 IT융합산업의 SW생산성 향상을 위해 구성할 ‘융합SW기술포럼’에 역량을 결집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았다.
차동완 KAIST 정보미디어 경영대학원장은 “그간 지속적 투자로 SW와 콘텐츠 분야의 기초 및 중급 전문인력은 조금씩 증가하는 추세”라면서 “이제부터라도 SW융합 전문인력 양성을 위한 백년대계를 마련해 차분하게 미래를 준비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진욱기자 coolj@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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