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머징 이슈] 영상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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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세상에 멀리 떨어진 사람끼리 얼굴을 보면서 대화를 나눈다는 사실은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관공서와 대기업은 물론이고 은행, 병원, 학교에도 영상회의 시스템을 활용하는 사례가 점점 늘고 있다. 상대 얼굴의 땀구멍까지 보이는 HD급 영상회의가 머지않아 CEO 직무실을 벗어나 평범한 일상으로 다가오게 된다. 집마다 벽에 걸린 HDTV가 오락도구가 아닌 고선명 통신매체로 바뀐다면 우리 삶은 어떻게 바뀔까. 진정 놀라운 일들은 HD급 영상회의가 널리 대중화된 이후에 벌어질 것이다.

영상회의 시스템은 고선명 대형스크린을 통해 멀리 떨어진 사람과도 마치 한 방에서 대화하는 듯한 원격현존감(telepresence)을 구현한다. 영상회의는 과거 기업체에서 흔히 사용해온 콘퍼런스콜, 여러 사람이 음성전화로 토의하는 회의보다 우월한 가상 접촉방식이다. 단순히 듣는 것(전화)보다 상대 얼굴을 보는 편(영상회의)이 커뮤니케이션 효과가 훨씬 뛰어나기 때문이다. 지난 80년대 기업용으로 흑백 영상회의시스템이 처음 등장하자 많은 사람은 음성전화가 그랬듯이 영상통화시장의 폭발적인 성장세를 기대했다. 하지만 초기 영상회의시스템의 보급은 지지부진했다. 장비가격은 터무니없이 비쌌다. 기껏 설치한 영상회의시스템의 영상신호와 음성은 엇박자에다 불안정했다. 무엇보다 네트워크 환경이 양방향 영상통신을 지원하기에 아직 미흡했다. 하지만 200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통신네트워크의 속도는 비약적으로 향상됐고 HD급 동영상의 양방향 전송이 일반화됐다. 영상회의시스템의 가격대도 보급형 HW장비는 수백만원, 웹기반 솔루션은 수십만원대로 떨어지면서 시장분위기는 대중화로 쏠리고 있다.

현재 국내 영상회의 시장은 폴리콤, 탠드버그 등 외국업체가 주도하는 HW장비와 국내 업체가 장악한 웹기반 제품이 6 대 4의 시장비율을 이루고 있다. 한국시장은 지난해 1000억원으로 큰 편은 아니지만 2013년까지 2400억원으로 연평균 20%씩 성장이 예상된다. 특히 웹기반 솔루션 시장은 연평균 33%로 더 빨리 늘고 있다.

세계 영상회의 시장은 2000년대에 들어와 두 차례 비약적인 성장의 계기를 맞는다. 지난 2003년 중국에서 조류독감 사스(SARS)가 발생했을 때 글로벌 기업들은 중국지사와 인적교류가 어려워지자 영상회의 시스템을 앞다퉈 설치했다. 또 2008년 고유가 파동을 거치면서 영상회의는 기업체의 교통수요, 즉 탄소배출을 억제하는 친환경 기술로서 가치를 새삼 주목받았다. 브리티시텔레콤(BT)과 시스코, HSBC, 애플 등 글로벌 대기업은 이미 영상회의 시스템을 전사적으로 도입해서 큰 성과를 올리고 있다. 출장경비 절감 및 업무효율성 향상을 통한 생산성 제고, 더 나아가 탄소배출 감축을 통한 그린경영의 수단이 되고 있다. 특히 BT는 2006년 연간 86만회 출장회의를 줄여서 2600억원의 출장비용 및 2000억원 상당의 업무효율향상으로 총 4600억원의 비용절감 효과를 달성했다. 이를 통해 BT는 탄소배출 감축을 통한 친환경 기업으로 고객 인지도를 높이는데 큰 성공을 거두고 있다.

유럽, 미국에서는 글로벌 기업들이 영상회의시장을 주도했지만 우리나라는 주요 관공서와 지자체가 영상회의를 앞서 도입했다. 사실 한국은 국토가 좁아서 영상회의시스템을 국내용으로 사용할 경우 효용가치가 좀 떨어진다. 권위적인 회의문화 때문에 참석자들이 카메라를 보면서 솔직한 발언을 하기 싫어하고 실질적인 의견수렴이 안 되는 사례가 다반사다. 이러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관공서에 보급된 영상회의 시스템은 대단한 장점이 있었다. 대형 스크린에 전국 기관장을 일렬로 모아놓고 일장훈시를 하는 사이버 권력의 쾌감은 중독성이 무척 강했던 것이다.

몇 년 전부터 LG, 삼성, 현대차, 포스코 등 대기업군에서 신속한 의사결정을 목적으로 영상회의 장비발주가 크게 늘었다. 이제는 중소기업과 교육계, 의료계에도 속속 확산되고 있다. 지난 연말 대전교육청은 산하 교육정보원 및 6개 초등학교에 영상회의솔루션을 이용한 원어민 영어교육 환경을 국내 최초로 구축했다. 영상회의 시스템으로 진행하는 원격수업은 실제 원어민 강사의 수업만큼이나 효과가 뛰어나 영어 공교육 확산에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영상회의 전문업체 폴리콤의 전우진 지사장은 “예상치 못한 다양한 서비스 분야에서 영상회의 장비를 구매하려는 수요가 늘고 있다. 올해도 40% 이상의 매출성장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 경제효과와 발전방향

KT가 국내 회의 20%를 영상회의로 대체하면 연간 출장비 44억원 절감, 업무생산성 40억원 향상, 탄소배출 25만톤 감축 등 총 137억원의 비용절감이 가능하다고 KT경제경영연구소는 추정한다. 경찰청은 영상회의 덕분에 연간 21억원의 출장비를 아끼고 16억원 상당의 업무효율성 향상을 가져왔다고 판단한다. 앞으로 지자체 신규발주와 구형장비의 교체수요, 국방수요 등을 감안할 때 영상회의 시장은 꾸준히 성장할 전망이다. 영상회의시장은 향후 5년간 약 2조8000억원의 전후방 경제효과와 5000명의 고용유발로 국가경제 발전에도 상당한 파급효과가 기대된다.

기술 면에서 영상회의는 HD급 고화질 장비가 대세를 이루는 가운데 협업 기능이 강조될 것으로 예상된다. 전문가들은 단순히 상대 얼굴을 선명하게 보고 또렷한 음성대화를 하는 차원을 넘어서 정보협업의 중요성을 지적한다. 요즘 커뮤니케이션의 최대 화두는 정보공유를 넘어 정보협업이다. 데이터, 음성, 영상이 하나로 융합돼 통합커뮤니케이션(unified communications)환경을 제공해야 업무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다. 웹기반의 보급형 영상회의 솔루션에 전자칠판과 같은 애플리케이션을 많이 붙일수록 활용가치는 높아진다. 붙박이 영상회의 시스템에 기동성을 보장하는 것도 시급하다. 유선기반인 영상회의는 반드시 정해진 회의실을 찾아가야 하는 장소적 제약이 심하다. 사무실 밖에서 활동하는 시간이 점점 늘어나는 요즘 근무환경과는 코드가 안 맞는 셈이다. 최근에는 노트북과 같은 휴대형 무선장비와 연동해서 언제 어디서나 영상회의를 할 수 있는 환경이 확산되고 있다. 이광수 KT경제경영연구소 부장은 “영상회의 시장이 활성화되려면 이동성을 보장한 커뮤니케이션 통합과 협업이 보장돼야 한다. 영상회의가 통합커뮤니케이션 도구로 진화하면 기업비용, 에너지를 줄이는 녹색성장을 선도할 것”이라고 말했다.

*영상회의의 한계

음성전화가 처음 발명됐을 때 어떤 사람들은 앞으로는 전화기가 보급되면 원거리 교통수요가 줄어들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현실은 반대였다. 음성통화량의 폭증에 따라 직접 현장에 가서 사람을 만나서 대화할 대면접촉의 필요성은 오히려 크게 늘었다. 최근 영상회의가 친환경기술로 관심을 끄는 핵심배경은 훨씬 크고 선명한 영상통신이 교통수요(탄소배출)를 억제할 것이란 막연한 기대감 때문이다. 이러한 예측의 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리다. 최근 미국에서 나온 연구결과에 따르면 상대의 얼굴을 더 선명하게 보는 것이 대면접촉의 필요성을 줄이는 데 영향을 미치는 주요인은 아니다. SD급 영상회의 시스템을 사용하던 고객들이 HD급 고화질 장비로 교체해도 업무효율이나 의사소통 퀄리티의 뚜렷한 향상을 못 느낀 것으로 나타났다. 전자칠판과 같은 협업도구를 영상회의 시스템에 덧붙이면 의사소통의 질은 다소 나아진다. 그러나 HD, 데이터 공유, 무선접속을 실현해도 회의실 안에 갇힌 영상회의 시스템의 기술적 한계는 극복하지는 못한다. 같은 조직 안에서 업무보고를 받고나 가까운 친지와 대화를 나눌 때는 별 문제가 없다. 하지만 영상회의로 중요한 협상을 진행할 때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영상회의실에 들어간 당신은 오로지 건너편 모니터에 비치는 상대방의 얼굴과 음성신호로 협상의도를 파악해야 한다. 카메라 앞에서 웃으며 긍정적 태도를 보이던 상대편 사람들이 문 밖을 나가면서 어떤 눈짓을 주고받는지 알아채기는 어렵다. 화장실에서 우연히 상대측 사람과 마주치면서 속내를 넌지시 떠보는 것도 불가능하다. 아무리 성능이 좋은 영상회의시스템도 회의실 바깥에서 벌어지는 정보까지 공유할 수 없다. 사람들은 중요한 협상을 할 때는 지구 반대편이라도 날아가서 대면접촉으로 확인하는 습관을 유지한다. 앞으로 HD보다 4∼6배 해상도가 높은 UD급 영상통신이나 3차원 영상이 뜨는 텔레프레즌스 통신이 구현돼도 상황은 거의 달라질 게 없다. 요컨대 붙박이 영상회의로는 대면접촉의 압도적 정보량을 따라잡기는 역부족이다. 일부 교통수요를 억제하는 효과는 있지만 넘지 못할 기술적 한계도 분명히 존재한다. 한국 특유의 대면 문화도 영상회의 활성화에는 걸림돌이다. 사회생활 잘하려면 가상접촉보다 직접 눈도장을 찍는 게 유리하다. 전화통화 100번보다 한번 만나 스킨십을 나누는 게 낫다. 이런 편견을 극복해야 우리는 첨단 영상회의기술의 놀라운 혜택을 마음껏 누릴 수 있다.

배일한기자 bailh@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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