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물자지수 1위의 도시가 수도인 나라, 세계에서 가장 비싼 물건이 잘 팔리며, 부자 마케팅이 주요한 비즈니스 영역인 나라. 바로 러시아다.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몰아치는 금융 위기가 러시아만 비켜가고 있는 듯한 풍경이다.
국민 GNP나 GDP 순위가 그리 높지 않은 러시아에서 이러한 고급 제품군과 고급 서비스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이유는 뭘까. 바로 이러한 것들이 러시아 올리가키(과두재벌)를 겨냥한 마케팅과 연관된 것이기 때문이다.
◇국가 위기 상황에서 등장한 졸부=금년 봄 포브스지의 발표에 따르면 러시아에는 무려 110명의 억만장자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중 상위 100명의 자산은 무려 5520억달러에 이른다. 이는 지난 2004년에 비해 4배나 늘어난 수치다. 러시아 연방의 통계에 의하면 이 기간에 무려 1890만명의 러시아인이 빈곤층이 돼 경제적 어려움을 겪어왔다. 올리가키의 자산이 늘어난 반면에 서민층에서는 극빈층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것이다.
소비에트공화국(소련)에서 자본주의로 넘어가는 시점과 모라토리엄과 같이 국가적인 위기 상황에 러시아에는 올리가키라고 불리는 다수의 억만장자가 등장했다. 이들은 러시아의 새로운 계급으로 급부상했다. 체제 붕괴와 모라토리엄과 같은 러시아의 경제적 위기 속에서 정경 유착을 통해 단기간 내에 갑부가 된 올리가키는 국가의 어려움을 발판으로 삼아 유례가 없는 부를 축적하게 된다. 그들에게 국가의 위기는 기회였던 셈이다.
올리가키는 단기간 내에 억만장자가 된 이들이자 세계에서 가장 사치스러운 인물로도 악명이 높다. 이들이 경쟁적으로 장만한 요트와 별장, 자동차, 전용기 등은 러시아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화려함으로 유명하다. 우리나라에서 부의 과시가 금기시되는 것에 비해 러시아에서는 가진 자의 권리라는 인식이 팽배해 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겠다. 하지만 끝이 없을 것 같던 올리가키의 위상도 점차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
◇올리가키, 몰락의 시작=이미 지난 10월 블룸버그에 따르면, 세계적인 금융 위기로 인해 지난 5개월간 러시아 재계 순위 25인이 입은 손실이 무려 2300억달러에 달한다. 엄청난 금액이지만 전체 올리가키를 휘청이게 할 만한 금액은 아니라는 것이 보편적인 평가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은 그간 러시아 올리가키의 사업 방식을 봤을 때 몰락의 전주곡일 뿐 본격적인 하향세는 이제부터라는 것이 러시아 현지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다수 러시아 올리가키의 매매나 투자 방식은 철저한 사전 조사를 통한 합리적인 투자형태라기보다 정경 유착을 통한 한탕주의 방식이 주된 형태였고 더불어 ‘감’에 의지한 주먹구구식이 빈번했기 때문이다. 러시아 전문가들은 이러한 올리가키의 사업 방식이 더이상 자본주의 사회에서 먹혀들지 않는다고 지적하고 있다.
현재 세계적인 정세뿐만 아니라 러시아 정세 또한 올리가키를 불편한 상황에 처하게 하고 있다. 단적인 예로 러시아 최고 갑부인 올레크 데리파카는 영국 규제개혁부 장관인 피터 맨덜슨에게 정치자금 5만달러를 주려 했다는 뇌물 스캔들로 인해 곤욕을 치르고 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과거 사업 파트너였던 마이클 체니에게 40억달러짜리 고소를 당해 법정에 서야 하는 신세가 됐다.
올리가키의 위기는 현재 세계적인 경제 위기로 인한 러시아 증권가의 대폭락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지난 5월 이후 러시아의 RTS 지표(RTSI)는 71%나 하락했다. 데리파카는 자신이 소유한 회사의 지분을 담보로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왔지만, 보유 사업체의 주가가 대폭락하면서 은행권에서 심한 자금 압박을 받고 있다.
이는 비단 데리파카만의 문제는 아니다. 현재 올리가키 소유의 기업은 대부분 데리파카와 같은 방식으로 은행대출을 받아왔다. 물론 러시아 정부에서 구제금융을 통해 구제할 의사를 보이고 있지만 현재 미하일 프리드만의 알파그룹에 20억달러의 구제금융이 지원됐을 뿐이다.
하지만 올리가키가 필요로 하는 구제금융 자금은 물경 1000억달러에 이른다고 알려져 있다. 이에 대해 러시아 정부가 어떻게 대처하는지에 따라 올리가키 소유의 기업들의 생사가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황혼기 올리가키의 운명은?=이러한 추세에 따라 미세하게나마 올리가키 내부에도 변화의 조짐이 보이고 있다. 그동안 끝없는 과소비의 주체였던 올리가키가 재산을 매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간 프로 축구팀과, 요트, 전용기, 미식축구팀, 런던과 프랑스의 별장, 심지어 잠수함까지 사들이던 이 억만장자들은 자신만의 독특한 소비생활에 변화를 주고 있다. 몇몇 올리가키는 자신의 전용기, 요트 등을 매물로 내놓기까지 하고 있다.
그동안 끝도 없이 이어질 것만 같았던 올리가키의 시대에 변환기가 왔음은 확실해 보인다. 공산주의 해체 이후 20여년 가까이 경박한 소비생활을 영위하며, 전근대적인 정경 유착으로 부를 축적해오던 올리가키에게 전환기가 도래한 것이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그간 올리가키의 소비에 관대한 시각이던 러시아인도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간 자신만의 영욕에만 관심이 있던 올리가키에게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요구하는 것이 그것이다. 개인적인 소비에는 천문학적인 지출을 해오던 올리가키가 빈민 구제와 같은 사회사업 등에는 철저히 외면해온 것에 대한 불만의 표현이기도 하다.
또 올리가키의 시대가 끝났다고 단언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몇몇 올리가키가 사라질 가능성은 있겠지만 전체 올리가키에게는 큰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분석이다.
이달 모스크바에서 최근 연례 행사처럼 개최되는 ‘백만장자 페어’가 열린다. 이번 전시회에서도 다이아몬드로 장식한 휴대폰, 마호가니 패널로 장식한 요트 등과 같은 제품들이 판매될 예정이다. 모스크바 백만장자 페어는 구매율이 높은 전시회로 명성이 높다. 이번 전시회 역시 성황을 이룰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관측이다. 물론 그 중심에는 올리가키가 있을 것이다.
모스크바(러시아)= 손요한 블루비즈 기획실장 yohan.so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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