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범죄에 대처하기 위한 통신감청협조 의무화’를 골자로 한 통신비밀보호법(통비법) 개정안을 두고 정치권 간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있다. 각종 흉악범죄와 산업 스파이가 증가하고 있는 만큼 서둘러 입법을 하거나 개정안을 손질해야 하지만, 갈등이 심화하다 보니 갖가지 오해만 빚어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지난달 30일 한나라당 이한성 의원은 국정원을 포함한 수사기관이 통신업체의 장비를 통해 휴대폰·이메일·인터넷메신저 등의 다양한 통신수단을 감청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개정안을 발의했다. 그러자, 17일 민주당 최재성 대변인은 논평을 통해 이는 ‘휴대전화를 합법적으로 감청하겠다는 것’이라며 이를 강력하게 비난했다.
◇“상시 감시용이다” vs“현행법과 동일하다”=통비법 개정안의 핵심은 감청설비가 없는 통신사업자들이 설비를 갖출 것을 의무화하는 것이다. 사업자가 설비를 갖추지 않아 기존 현행법으로는 법원의 영장을 받고도 이를 집행할 수 없는 문제가 있어서다. 그러나 이는 상시로 감시하기 위한 용도라는 우려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민주당·민주노동당과 시민단체는 통비법이 개정안대로 개정될 경우 통신업체가 상시로 감청할 수 있어 사생활 침해가 우려된다고 주장했다.
진보네트워크 측은 “통비법은 피내사자 등 감청 대상이 광범위해 문제로 지적돼 왔는데, 여기에 더해 상시감청까지 하려는 것”이라며 “더구나 이용자 로그기록을 보관하도록 의무화하는 것은 시대적 과제인 개인정보보호를 완전 역행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한나라당과 수사기관은 현 통비법으로도 휴대폰에 대해 감청할 수 있지만 감청협조설비가 없는 것을 보완하는 것이며, 통화내용이나 로그기록 보관도 현행과 동일하다고 반박했다. 더구나 통신수단의 발단으로 인해 광대역통신망 등에 대한 대비가 없다면 감청 제도 자체가 유명무실해진다고 주장했다.
국정원 측은 “통신업체가 상시로 통화를 녹음·보관하고 수사기관이 언제든 이를 들여다본다는 오해가 있다”며 “통신업체는 법원에서 허가한 기간 동안만 대상자의 통신 내용을 분리하고 암호화해서 수사기관에 전달하는 것이고 집행방법은 현행법에서 아무런 변동이 없다”고 설명했다.
◇감청은 필요한가=감청 제도에 대한 필요성에는 어느 정도 공감대가 있는 편이다. 특히 외국인의 경우 국내에서 범죄를 저지를 경우 이를 추적할 근거가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내국인은 계좌추적 등 여러 가지 방안이 있지만, 외국인은 감청에 대한 의존도가 절대적이다. 또한, 최근 산업기밀을 유출하려는 산업스파이 적발 현황이 높아지는 것도 감청 제도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미국과 영국 등 선진국도 감청협조 설비 관련 법제도를 마련했다. 미국은 1994년 칼레아(CALEA)라는 통신감청 지원법을 만들어, 통신업체 감청협조 설비 구축을 의무화했다. 영국은 2000년 수사권 규율법을 통해 설비 구축을 의무화하면서 협조 의무 이행시 기술자문위원회에 자문을 하도록 했다. 독일과 네덜란드, 호주 등도 1990년대 후반 감청협조설비 구비를 의무화하거나 지침을 내렸다.
◇“목적 외 사용 제한, 영장 심사 강화돼야”= 집행이 현행과 동일하며 법원의 허가를 현실화하는 것이라는 해명에도 불구하고 는 통신비밀보호법에 대한 논란이 그치지 않은 것은 오남용에 대한 우려 때문이다.
A라는 범죄 명목으로 감청을 했다가 B라는 범죄의 실마리를 잡는다고 해서 이를 증거로 활용할 경우 남용에 해당할 수 있다. 이러한 관행이 자리 잡게 되면 B범죄 수사 영장이 기각될 경우에도 A 범죄를 명목으로 수사에 착수하는 경우도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 9월 법원노조 직원의 수사정보 유출 사건의 결정적 단서가 이와는 전혀 다른 목적의 감청에서 확보된 사건이 일어나면서 남용에 대한 우려가 더욱 커졌다. 영장 발부도 더욱 신중을 기울여야 한다는 지적이다. 감청은 사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만큼 감청이 아니면 수사가 불가능한 수준에 이르렀을 때 발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임종인 고려대학교 교수는 “수사감청제도 자체는 중범죄에 대처하기 위해 필요한 제도”라며 “국민이 안심할 정도로 영장이 신중하게 발부되기 위해서 여러 보완제도가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문보경기자 okmun@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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