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언제까지 미제 물건만 사 쓰고 라디오 하나 몬 맹글어 되겠나! 누구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가? 우리가 한번 해보는 기라!”
1958년 1월 구인회 락희화학 창업주가 철회·정회·태회·평회·두회 등 형제와 당시 34세인 구자경 락희화학상무(현 LG명예회장)를 불러모아 전한 말이다. 이것이 대한민국 전자정보통신부문 ‘산업’ 역사의 시작이다.
27일로 LG전자가 창립 50년을 맞는다. LG전자의 역사는 곧 우리나라 전자산업의 역사다. 대한민국 수출의 40%, 무역수지 70%를 담당하는 전자정보통신 산업도 올해로 50년을 맞았다. 떠들썩하게 잔치를 벌일 만도 한데 LG전자는 50년사 발간 외에는 별다른 기념식도 갖지 않을 예정이다. 새로운 50년을 준비해야 할 시점일 뿐 과시성 행사를 벌일 필요가 없다는 판단에서다. 직원들은 이날 쉰다.
◇최초라는 수식어 달고 살아=LG전자의 모태는 1958년 고 구인회 명예회장이 부산시 연지동에 세운 금성사다. 당시만 해도 ‘전자’라는 용어 자체가 낯설었다. 전자제품이라고 해야 외제 라디오와 소수의 미국산 수입 TV가 전부였다. 이에 구인회 사장은 라디오의 국산화를 결심하고 회사를 세웠다.
‘최초’라는 단어는 LG전자에 따라붙는 수식어가 됐다. 1959년 국산라디오 ‘A-501’을 만들고 이어 ‘가전은 금성’이라는 이미지로 선풍기·전화기·냉장고·세탁기·에어컨 등 생활가전 등을 국내 최초로 개발했다. 1962년에는 라디오 62대를 미국에 최초로 수출했으며 1965년에는 흑백TV까지 최초 생산에 들어갔다.
1978년, 가전업계 최초로 수출 1억달러를 달성한 LG전자는 1982년 국내 최초 마이크로 컴퓨터인 ‘마이티’로 시작해 1998년 세계 최초 60인치 PDP TV 개발까지 성공했다. 2005년 만든 102인치 PDP TV는 3년 넘게 세계 최대 제품으로 명성을 날렸다.
◇글로벌화와 노경문화 선도=2000년대 LG전자는 글로벌 전자기업으로 도약했다. 창업 당시 300명으로 출발한 임직원 수는 현재 120여 개국에 위치한 해외법인과 지사를 포함해 8만2000명에 이른다. 매출도 5000만원에서 지난해 41조원으로 급등했다. 1968년 미국 뉴욕지사 설립을 씨앗으로 1982년 10월 국내 기업 최초로 미국 앨라배마주 헌츠빌 지역에 생산법인을 설립했다. 헌츠빌의 성공을 계기로 LG전자는 해외 진출을 점차 확대하게 됐고 한국 전자산업 기업들의 글로벌 시장 진출에 큰 자극제가 됐다.
LG전자는 노사관계 문화의 역사도 새롭게 쓰고 있다고 자랑한다. 이 회사 노사는 1990년 이후 19년 연속 무쟁의 임금교섭 타결을 이어갔다.
◇새로운 50년을 향해=LG전자는 삼성전자와 함께 지난 50년간 전자정보통신 산업 성장사를 써왔다. 60년대 초반 60달러에 불과했던 대한민국을 2만달러, 세계 12위 경제대국을 이끌어냈다. 아직 글로벌 환경은 녹록지 않다. 불안한 원달러 환율과 원자재값 급등, 기술 보호주의 강화, 세계 표준에 대한 문제가 숙제다. 끊임없이 새로운 원천 기술을 개발해야 하고 경쟁력을 갖춰 글로벌 전자업계로 우뚝 서야 한다. 그것이 LG전자의 50년과 한국의 전자산업 50년을 되돌아봐야 하는 이유다.
남용 LG전자 부회장은 “지난 50년의 우리 역사는 고객을 위한 역사와 다름없다”며 “고객을 위한 끊임없는 가치창출로 100년을 넘는 위대한 기업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김동석기자@전자신문, ds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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