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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에서 병원에 가본 사람은 공감하겠지만 미국 의료서비스는 굉장히 비싸고 불편하기로 악명이 높다. 이윤만 추구하는 미국식 자본주의의 병폐 때문에 미국인은 엄청난 의료비를 쓰면서도 건강수준은 OECD 최하위권이다. 인터치헬스사는 미국 의료계의 고질적 문제를 로봇기술로 해결할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해안고속도로를 타고 북쪽으로 한 시간 반쯤 달리면 아름다운 휴양도시 샌타바버라가 나타난다. 의료로봇업체 인터치헬스는 이곳 해안가에서 좀 떨어진 한적한 상업지역에 자리잡고 있다. 의료로봇의 대가인 율룬 왕 박사가 지난 2002년 설립한 인터치헬스는 세계 최초의 로봇 기반 원격진료서비스를 선보여 의료계의 비상한 주목을 받고 있다.

 이 회사가 생산하는 유일한 로봇제품인 ‘RP-7’은 수술을 하거나 환자를 직접 간병하는 로봇이 아니다. 의사가 멀리 떨어진 환자와 자연스럽게 영상통화를 하도록 깨끗한 동영상을 원하는 위치에서 전송해줄 뿐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바퀴 달린 영상전화기’에 불과하다. 의료로봇이라고 무슨 첨단기술이 적용된 것도 아닌데도 RP-7의 대당 판매가격은 무려 30만달러, 우리 돈으로 3억원에 가깝다. 놀라운 사실은 미국의 종합병원 50여곳에서 이미 수억원짜리 영상전화기 로봇을 도입했고 일본·유럽·중남미 16개국 의료진이 앞다퉈 구매하고 있다는 점이다.

 RP-7의 상업적 성공은 킬러앱의 부재를 들먹이는 국내 로봇업계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능형 로봇이 성공하는 데 꼭 획기적인 첨단기술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방증이기 때문이다.

 인터치헬스를 설립한 율룬 왕 박사는 의료로봇 시장을 처음으로 개척한 선구자다. 중국계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UCSB에서 박사학위를 밟던 중 의료분야에서 거대한 로봇수요가 일어날 것이라 직감했다. 왕 박사는 같은 연구실의 동창들과 의기투합해 1989년 수술용 로봇업체 컴퓨터모션을 설립했다. 그가 개발한 세계 최초의 수술보조 로봇인 이솝(AESOP)은 내시경이 장착된 로봇팔을 이용해 집도의의 미세한 손떨림을 막고 절개 부위도 최소화할 수 있어 의료계의 호평을 받았다.

 그는 컴퓨터모션을 연매출 2500만달러의 유망기업으로 키웠지만 예기치 못한 암초에 부딪혔다. 경쟁사인 인튜티브 서지컬(10월 26일자 4면 기사 참조)이 대규모 특허소송을 걸어온 것이다. 율룬 왕은 결국 컴퓨터모션을 경쟁사에 매각하는 결정을 내린다. 충분한 자본을 챙긴 그는 동료들과 함께 또 다른 의료로봇회사 인터치헬스를 설립했다.

 의료계에서는 왕 박사가 새로운 수술로봇을 개발해 재기할 것이라 예상했다. 그러나 인터치헬스가 선보인 신형 의료로봇은 뭔가 이상했다. 로봇팔이 달린 수술도구가 아니라 바퀴 달린 영상전화기였던 것이다.

 ◇RP-7의 외형과 기능=RP-7을 처음 본 소감은 사람을 쏙 빼닮았다는 것이다. 인간형 로봇처럼 팔·다리를 갖춘 것도 아니지만 RP-7은 여태까지 접한 로봇 중에서 인간과 가장 흡사한 느낌을 준다. 얼굴 부위에 해당하는 모니터에서 사람의 실제 얼굴이 뜨기 때문이다.

 전원을 켜자 로봇 모니터에는 다른 방에 있던 스티브 조단 부사장이 나타나 반갑게 인사를 한다. 하지만 로봇본체에는 충전을 위한 전원코드가 아직 연결된 상태였다. 스티브 부사장(로봇)은 고개를 뒤로 제껴서 콘센트 위치를 확인하더니 로봇을 앞으로 움직여 전원코드를 직접 뽑아버렸다. 그는 기자에게 조용히 다가오면서 별 것 아니라는 듯 자유로운 기동성을 과시했다. 전후좌우·수평이동까지 모든 동작은 지극히 조용하고 인간의 몸동작처럼 자연스러웠다.

 모니터 위에 장착된 최고급 카메라는 실내를 돌아다닐 때는 광각모드로 사람과 대화할 때는 망원줌으로 전환된다. 로봇을 원격제어하는 사람이 보는 화질은 최상이다. 로봇을 통해 들리는 상대방 음성도 전화기 수준이 아닌 고품위 사운드다. 청진기와 의료정보 접속기능도 로봇옵션으로 장착된다. 변변찮은 미국의 인터넷 환경에서 이만한 성능을 구현하기란 확실히 쉽지가 않다.

 기자와 동행한 KETI 연구원은 “웹카메라를 장착한 로봇플랫폼이라면 우리도 쉽게 만들 수 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국내 연구소에서 대충 만든 원격로봇과 RP-7의 기계적 완성도를 비교하자면 싸구려 라디오와 수천만원짜리 외제 오디오만큼이나 차이가 났다.

 ◇비싸도 잘 팔리는 이유=한국에서 성능이 더 좋은 통신로봇을 개발하더라도 RP-7처럼 수억원대에 팔리는 프리미엄 전략은 불가능하다. 한국산 로봇에는 ‘존스 홉킨스 병원에서 수년간의 임상실험을 거친 최고급 의료장비’란 상징자본이 없기 때문이다. 인터치헬스는 의료기기로서 신뢰성을 확보하기 위해 지난 몇년간 유명 병원에서 원격로봇의 임상실험을 해왔다. 덕분에 RP-7은 세계에서 가장 비싼 윈도XP기반의 PC기기가 됐다.

 율룬 왕 CEO는 “싸구려 웹캠에도 환자 얼굴은 보인다. 그러나 RP-7은 정확한 의사의 진단을 돕도록 어떤 조명에서도 실제 피부색을 보여주도록 설계됐다”고 자랑했다. 하버드 의대의 심장전문의가 화면색상을 튜닝했다는데 누가 토를 달겠는가. 그는 생명이 걸린 의료로봇분야에서 보급형 제품을 내놓을 생각은 없으며 더 우수한 기능의 로봇을 비싸게 팔겠다고 말했다.

 인터치헬스의 미래는 밝다. RP-7을 의료현장에 투입한 결과 대부분 환자는 로봇을 통해 의사와 병증을 상담하는 상황에 호의적이고 의료진의 노동강도와 의료비를 줄이는 데 효과가 뚜렷했다. 세계 16개국의 병원과 양로원에서 수백대의 로봇닥터가 회진을 돌고 있다. 의료시장이 개방되면 미국 병원이 로봇기반의 원격진료로 한국환자를 끌어가는 날도 올 것이다.

◆인터뷰-율룬 왕 인터치헬스 CEO

 “우리는 한정된 의사와 간호사가 점점 더 늘어나는 의료수요를 감당할 수 있는 논리적 해결책을 내놓았다고 판단합니다.”

 율룬 왕 CEO는 노인을 간병하거나 수술하는 로봇이 의료로봇시장의 전부가 아니라고 말을 꺼냈다. 환자가 의사를 보다 쉽게 만나도록 도와주는 통신도구(로봇)야말로 투자대비효과가 가장 뛰어난 의료로봇이라는 설명이다.

 “병원에서 의사가 어떻게 환자를 치료하는지 잘 살펴보세요. 의사의 손보다 머리(판단력)가 훨씬 중요하다는 사실을 금방 알 겁니다. RP-7은 멀리 있는 환자의 병증을 파악하는 데 탁월한 도구입니다.

 그도 처음에는 의사가 환자를 진찰하기 쉽도록 침대마다 영상카메라를 장착한 지능형 병실을 구상했다. 하지만 환자들은 침대에 장착된 카메라로 의사의 진단을 받는 상황에 심한 불쾌감을 내비쳤고 대신 로봇을 병실에 투입하자 이 같은 거부감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율룬 왕은 “원격로봇은 의사·간호사의 활동범위를 전국으로 확장시켜 의료시스템의 경직성을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자부했다. 그는 이미 세계 16개국에서 로봇을 이용한 원격진료를 하고 있다면서 아직 RP-7을 한대도 도입하지 않은 한국 의료계의 관심을 촉구했다.

 멋진 아이디어지만 누구나 쉽게 모방할 수 있지 않냐고 물었다. 율룬 왕은 빙긋이 웃으며 다음과 같이 답했다. “누구나 비틀스 노래를 들으면 쉽게 따라 부르지만 그런 명곡을 아무나 작곡하지는 못하지요. 누군가 앞서 새로운 사업모델을 구축했다면 그 지적재산권은 당연히 존중돼야 합니다” 그는 탁월한 로봇엔지니어인 동시에 의료시장에서 로봇기술의 한계도 너무 잘 아는 영리한 사업가였다.

 샌타바버라(미국)=배일한기자@전자신문, bail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