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은 전 세계 휴대폰 시장의 절대 강자로 군림하고 있는 노키아의 텃밭이다. 노키아는 100년이 넘는 기업 역사를 바탕으로 유럽인의 신뢰를 한 몸에 받아 왔고 90년대 휴대폰 시장에 진출한 이후부터는 ‘휴대폰=노키아’라는 이미지를 뿌리내리면서 유럽 고객의 사랑을 독차지 해왔다.
그런데 최근 들어 그런 노키아의 아성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한국 휴대폰에 마음이 뜨거워진 유럽인이 토종기업 노키아로부터 하나 둘씩 이탈하기 시작한 것. 이미 프랑스와 러시아에서는 한국산 휴대폰이 노키아를 제치고 1위의 왕좌를 차지했고, 이탈리아·영국·네덜란드·벨기에 등에서는 1위인 노키아를 바짝 뒤쫓고 있다.
역사를 중요시 여기고 자존심 강하고 까다롭기로 유명한 유럽인의 마음을 우리 기업은 어떻게 사로잡았을까.
◇고객에, 고객에 의한, 고객을 위한 마케팅=유럽 휴대폰 시장은 우리나라나 미국과 달리 오픈 마켓, 즉 소비자가 이동통신사업자를 거치지 않고도 휴대폰을 직접 구매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추고 있다. 이 때문에 소비자 대상의 브랜드 인지도를 높이는 것이 비즈니스의 최우선 과제다.
우리 업체가 불모지나 다름 없던 유럽을 뚫기 위해 처음 시도한 것이 바로 관문 마케팅. 3대 관문 도시인 파리(프랑스)·프랑크푸르트(독일)·런던(영국)의 국제공항을 삼성전자와 LG전자의 휴대폰 광고로 도배를 했다. 공항 이용객이 움직이는 동선과 시선의 경로에는 어김없이 한국 휴대폰이 눈에 띄었고, 출국장을 빠져 나오면 대형 조형물이 그 위용을 알렸다.
스포츠마케팅도 중요한 마케팅 수단이다. 삼성전자가 98년 나가노 동계올림픽 무선분야 공식 후원사가 되면서 시작한 스포츠마케팅은 시드니·아테네올림픽으로 이어지면서 유럽인에게 삼성이라는 기업을 인식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2005년부터 후원을 시작한 첼시 풋볼 클럽이 프리미어리그에서 선전을 거두면서 삼성 휴대폰의 브랜드 인지도는 급상승하게 됐다. 이를 기점으로 삼성전자의 유럽 내 휴대폰 판매량이 1년여 만에 두 배로 뛰어 오르기도 했다.
LG전자는 프리미엄 명품 마케팅에 승부를 걸었다. 한국산이 싸구려가 아니라는 이미지를 심기 위해 영국 왕실과 우호적인 관계를 구축하는 데 역량을 집중했고 최고의 명품 백화점인 헤롯에 진입해 VIP가 쓰는 LG 휴대폰이라는 이미지를 구축했다.
도미니크 오 LG전자 유럽담당 상무는 “프라다와의 제휴는 디자인 혁신뿐만 아니라 LG 휴대폰 사업의 체질을 변화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면서 “고객의 요구를 읽는 새로운 시도를 지속해나가겠다”고 말했다.
◇3G 리더십 가속도 붙인다=유럽 오픈마켓 시장에서의 이 같은 성과는 GSM 진영을 중심으로 급속히 확산되고 있는 3G 시장에서 우리 업체가 주도권을 쥐는 기회로 작용하고 있다. 올해 11억2000만대로 예상되는 휴대폰 시장에서 3G 휴대폰 비중은 25%를 넘어설 전망이다.
우리 업체는 WCDMA·HSDPA 등 3G 네트워크를 지원하는 고속·첨단의 제품을 노키아나 소니에릭슨보다 빠르게 출시해 선점 효과를 누리고 있다. LG전자가 최근 현지에 출시한 500만화소 카메라폰 ‘뷰티(LG-KU990)’와 ‘터치스크린 스마트폰(LG-KS20)’은 3.6Mbps 고속 데이터 접속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윈도 운용체계(OS) 호환·무선랜 지원 등 다양한 멀티미디어 기능을 지원하면서 유럽인에게 IT의 신천지를 소개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삼성전자 역시 최근 출시한 500만화소폰(SGH-G600)이 영국에서 올해의 휴대폰으로 선정되는 등 3G 서비스에 최적화할 수 있는 고성능 제품이 현지에서 속속 성과를 내고 있다.
표현철 삼성전자 유럽통신법인 상무는 “유럽 휴대폰시장은 내년에는 약 2억2000만대의 규모로 2.5% 정도밖에 성장하지 않겠지만 고가 프리미엄폰·3G폰 위주의 교체 수요가 본격화하고 있다”면서 “그동안 다져온 브랜드 인지도와 차별화된 제품력으로 1위와의 격차를 줄여나가는 게 가장 큰 목표”라고 말했다.
◆유럽인의 머스트해브 명품이 된 한국산 휴대폰
‘프라다폰·세레나타·아르마니폰·뷰티폰….’
유럽인을 설레게 하고 있는 한국산 명품 휴대폰이다. 명품이라면 당연히 이탈리아의 세계적 패션 거장이 디자인한 의류나 가방·소품이 위주였지만 최근 유럽 젊은이에게는 한국 휴대폰이 꼭 갖고 싶은 명품으로 자리 잡았다.
삼성전자가 뱅앤올룹슨과 제휴해 출시한 세레나타는 제품 가격만 1400유로(한화 187만원)에 달한다. 여기에 루이비통이 제작한 가죽케이스는 400유로(53만원). 함께 구입하면 240만원이 넘는다. 이 같은 가격 책정이 가능했던 것은 하이엔드 제품을 원하는 고객층이 분명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 때문. 조르지오 아르마니와 협력해 만든 아르마니폰도 마찬가지. 혁신적인 디자인 명품을 원하는 유럽 고객에 한국 휴대폰을 선택할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다는 게 삼성 측의 설명이다.
명품폰의 성과는 LG전자가 프라다폰으로 먼저 입증했다. 600유로대의 고가임에도 불구하고 8개월여 만에 유럽에서만 30만대 정도가 판매됐다. 유럽 고객의 감성과 소비취향을 첨단 제품으로 녹여내면서 뜨거운 사랑을 받았다. 프라다폰 덕분에 LG전자는 폰즈포유·카폰웨어하우스 등 주요 휴대폰 매장에서 판매 1위 기업이 됐고 현지 시장점유율도 3%에서 5%대로 올랐다. 500만화소 카메라폰 ‘뷰티폰’은 유럽 젊은이를 중심으로 출시 3주만에 20만대가 팔려나갔다.
마창민 LG전자 MC전략기획팀장 상무는 “고객이 느끼는 가치를 중심으로 새로운 관점을 찾아낸다면 가격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면서 “유럽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전 세계 프리미엄 휴대폰 시장을 찾아나가겠다”고 말했다.
◆인터뷰-나영배 LG전자 영국법인장
“영국은 유럽 소비자의 취향을 테스트해 볼 수 있는 최적의 시장입니다. 특히 첨단 제품을 향한 고객의 평가가 아주 정확합니다. 영국에서의 성공이 유럽에서의 성공으로 이어진다는 각오로 공을 들이고 있습니다.”
나영배 LG전자 영국법인 상무는 최근 LG가 휴대폰 사업에서 거두고 있는 성과가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님을 강조했다. LG 휴대폰을 프리미엄 제품으로 만들기 위해 한국 엔지니어가 밤낮없이 연구개발에 매달렸다면 영국법인 임직원은 고객의 인사이트를 발견하기 위해 부단히 발로 뛰었다.
각국의 주요 휴대폰 매장을 돌며 고객의 선호도가 어디에 있는지 조사했는가 하면 제품 하나하나 색다른 마케팅 방법을 시도했다. 초콜릿폰은 론칭할 당시 웨인 루니 풀럼 선수의 연인 콜린 맥러플린을 홍보대사로 선정, 이후 루니 선수가 선전할 때마다 맥러플린이 사용하는 초콜릿폰이 함께 노출될 수 있도록 해 성과를 거뒀다. 샤인 출시 때에는 런던 도심의 주요 빌딩 사무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직접 체험하는 행사를 가지기도 했다.
나 상무는 “영국의 인터넷 환경이 빠르게 좋아지고 있는 데서 착안해 체험서비스에 참가한 소비자를 다시 온라인 커뮤니티로 끌어들여 활동하도록 했다”면서 “이들은 결국 LG 고객이 됐다”고 소개했다.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전략적 판단도 많았다. 유럽 거래처와 협력체계를 강화하기 위해 네덜란드에 있던 유럽 본부를 영국으로 옮겨왔고 최근에는 밀라노 디자인센터도 런던으로 옮겨왔다.
나 상무는 “LG의 브랜드가 유럽에서 프리미엄 브랜드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은 영국 왕실과의 신뢰를 구축했던 것”이라며 “지난 5월 엘리자베스 여왕의 차남인 앤드류 왕자가 직접 법인 사무실을 찾기도 했다”고 소개했다. 나 상무는 “한국 기업이 해외에서 성과를 거두려면 결국 철저하게 현지화하는 수밖에 없다”며 끝을 맺었다.
정지연기자@전자신문, jyj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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