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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속담은 지능형 로봇에도 딱 들어맞는다. 지능형 로봇 산업이 다품종 소량생산으로 진화할수록 로봇의 개발과 제조는 점차 분리된다. 반도체산업이 팹리스와 파운드리 가공업체로 분업구조를 형성했듯이 로봇도 전문화된 협업 네트워크가 등장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지금이 인터넷 열풍이 한창이던 1990년대 후반이라고 가정해보자. 당신은 작은 인터넷 벤처를 시작할 꿈에 부풀어 있다. 인터넷 사업을 위해 우선 비즈니스 모델부터 만들고 나면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된다. 깔끔한 웹사이트를 구축하고 서버를 운용하고 온라인 광고·결제시스템을 접목시키는 등 나머지 작업은 전부 외주업체(EMS)로 처리할 수 있다. 외부 전문기업의 도움을 받으면 웹사이트를 직접 만들거나 온라인상의 기술적 문제로 고민할 필요가 없다. 회사를 설립하는 데 진입장벽이 턱없이 낮았으니 일확천금을 꿈꾸는 인터넷 벤처가 우후죽순 생겨난 것도 당연했다. 인터넷 산업이 급성장한 배경에는 벤처기업이 손쉽게 아이디어를 펼칠 수 있는 산업 생태계, 협업체계의 역할이 컸다.

 2007년의 현재로 돌아와보자. 당신은 유망하다는 지능형 로봇 산업을 시작할 계획이다. 청소로봇을 제외하면 어떤 로봇을 만들어야 할지 기획단계부터 막막하다. 신형로봇의 컨셉트를 잡고 제품설계가 끝나면 적절한 가격과 성능의 부품을 찾아야 한다. 어렵사리 로봇 시제품을 만들어도 양산단계까지는 산 넘어 산이다. 로봇금형의 단차와 기계성능·색상·안전규격까지 맞추려다 보면 예정된 출시일정이 몇 달 또는 1년 이상 늦춰지기도 한다. 벤처기업이 새로운 로봇제품의 생산전공정을 홀로 커버하기란 매우 부담스러운 일이다. 로봇제조에 경험이 있는 외부 협력사를 찾기도 쉽지 않다. 결국 영세한 벤처기업은 로봇 양산단계를 못 넘고 문을 닫는 사례가 속출하게 된다.

 ◇로봇 개발과 제조의 분리=지능형 로봇을 직접 만들어본 기업은 대부분 로봇개발과 제조를 분리할 필요성에 동의한다. 움직이는 기계로봇을 완성도 높은 가전제품으로 만들다 보면 일개 중소기업이 지닌 기술역량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지능형 로봇 산업이 로봇개발과 제조분야를 분리해서 협업체계를 갖춘다면 지금보다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다. 어차피 지능형 로봇은 개별고객의 수요에 맞춰가면서 다품종 소량생산의 극단적 사례로 진화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로봇벤처는 고객의 수요를 연구하고 신제품을 개발하는 일만 해도 벅차다. 그 수많은 고객의 커스터마이징 제작수요를 단일기업이 커버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로봇제조에 특화된 협업 네트워크가 생긴다면 유연한 생산시스템을 이용해 개인의 사용환경에 최적화된 로봇생산이 가능해진다.

 이러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국내 기업은 로봇제조의 전공정을 자체적으로 해결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로봇제조를 믿고 맡길 만한 EMS가 없다는 것이 가장 큰 현실적 이유다. 요즘 지능형 로봇업체로 자리 잡은 회사들은 초창기에 청소로봇·교육로봇·보안로봇 등을 만드는 과정에서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나름대로 축적한 로봇제조의 노하우를 외부 제조업체가 따라잡기는 힘들고 쉽게 이전해줄 이유도 없다. 또 제조업을 하려면 직접 부품도 조달하고 제품생산까지 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워낙 뿌리가 깊다. 저마다 최고라는 로봇엔지니어들의 자만심도 협업체계의 등장에 방해요소다.

 이런 풍토에서도 로봇EMS 모델이 생겨나 자생적인 로봇 협업체계가 형성되는 신호탄으로 해석된다. 지난 3월 유진로봇·마이크로로봇·다사로봇 등 6개 지능형 로봇기업은 공동출자로 로봇에버를 설립했다. 이 회사는 지능형 로봇업계에서 필요한 로봇부품을 공동구매하고 모듈별 주문제작을 시도하고 있다. 또 내년 초부터 고객사가 주문하는 로봇완제품을 제작해주는 로봇EMS도 시작할 예정이다. 이미 고객사들은 부품공동구매로 적잖은 원가절감혜택을 누리고 있다. 이러한 협업체계가 좀 더 발전하면 현재 지능형 로봇업계는 로봇기획과 디자인 엔지니어링, 모듈별 제조업체들로 분업화될 전망이다.

 ◇로봇협업의 걸림돌=로봇기업 간의 협업체제가 본궤도에 진입하려면 선결해야 할 과제가 있다. 혼자서 할 때보다 여럿이 하니 유리하다는 점을 확실히 증명해야 한다. 익명을 요구한 로봇업체 관계자는 “로봇EMS는 장기적으로 바람직한 모델이지만 기술·생산 측면에서 결코 쉽지 않다”고 지적했다. 또 국내 로봇시장이 EMS로 수익을 남길 만한 물량이 안 되기 때문에 제조를 맡겨도 원가가 별로 싸지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마디로 로봇EMS가 기존 로봇업체를 능가할 정도의 로봇개발, 제조경험을 쌓으려면 3∼4년의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것이다. 여타 지능형 로봇업체도 대체로 로봇EMS를 지켜보는 자세다.

 아마도 로봇협업의 최대 수혜자는 중소기업이 아니라 맞춤형 로봇을 주문·설계하는 고객이 될 전망이다. 네티즌이 직접 콘텐츠를 만드는 UCC처럼 로봇분야에서도 UCR(User Created Robot) 시장이 활성화되려면 기존의 생산시스템으로는 불가능하다. 식당에서 냅킨 위에 새로운 로봇설계도를 그렸더니 보름 뒤에 시제품이 나오고 거액의 투자까지 받는 로봇벤처의 성공신화가 나오려면 거미줄처럼 유연한 협업체계가 갖춰져야 한다. 지능형 로봇시장은 애플리케이션이 워낙 다양하기 때문에 일부 대기업이 아니라 각 사용자의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서만 잠재수요가 온전히 개발될 수 있다. 협업체계는 개인의 로봇시장 참여를 가능하게 만드는 전제조건이다.

 배일한기자@전자신문, bailh@

 

 ◇김창근 로봇에버 사장 인터뷰

 “로봇기업끼리 서로 돕고 상생하는 환상적인 로봇 생태계를 만들고 싶습니다.”

 김창근 로봇에버 사장은 국내 로봇업계에 생소한 협업체제를 앞장서서 도입하고 있다. 그는 지난 3월 회사를 설립한 이후 로봇부품 공동구매로 고객사의 원가부담을 평균 5%씩 줄여 호평을 받고 있다. 여러 중소업체가 힘을 합쳐서 부품구매력을 키운 결과다. 그는 고객사의 부품소싱 대행에서 한 걸음 나아가 로봇세트를 통째로 제조해주는 EMS사업까지 시작할 계획이다.

 “로봇벤처가 성공하려면 신제품 개발과 마케팅 외의 업무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영세한 벤처기업이 제품양산에 매달리다가 제풀에 쓰러지는 상황은 국가적 손실이에요.”

 그는 로봇EMS의 전제조건으로 신뢰를 강조한다. 외부업체에 로봇제조를 맡겼다가 개발정보가 유출될까 걱정하는 사회풍토에서는 EMS가 성립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김 사장은 “대만의 파운드리업체 TSMC가 세계 1위로 성장한 배경에는 고객기업의 철저한 기밀보호가 있었다”면서 어떤 로봇기업도 믿고 의뢰하는 로봇 EMS기업이 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내년 초부터 지능형 로봇에 꼭 필요한 비전모듈도 직접 생산한다는 설명이다. 그는 많은 중소업체가 초보적인 정보교환도 거부한 채 함께 몰락해온 사례를 지능형 로봇산업에서 되풀이해선 안 된다고 강조한다.

 “지능형 로봇 산업이 성공하려면 끊임없이 소비자와 대화하면서 생산양식을 바꾸는 롱테일 전략이 필요해요. 이에 적합한 로봇제조 협업 네트워크가 국내에서 등장한다면 한국의 지능형 로봇 산업은 세계를 선도할거라 확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