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후지쯔 김병원 사장(53)은 올 봄 33년동안 피워 온 담배를 딱 끊었다. 특별히 금연하게 된 이유는 없단다. 그냥 끊었다고 한다. 금단 현상에 대해 묻자 “난 그런거 없다”고 잘라 말한다. 내 의지로 끊었는데 피고 싶다는 생각이 왜 드냐고 되려 반문한다. 이 정도면 성격 정말 ‘칼’이다. 가느다란 눈, 까만 피부,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그를 자세히 보니 영락없이 촌사람이다.
재밌는 얘기나 하다 가라며 실웃음을 짓는 그와 나눈 첫 마디는 요즘 술이 늘어 걱정이란다. 부장시절까지는 소주 1∼2잔이 전부였는데 이사되고 대표되다 보니 어느 새 한병을 훌쩍 넘기는 상황이 자주 벌어진다는 얘기다.
북한산과 청와대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18층 사장실에서의 인터뷰는 시종일관 ‘날씨 더운데 어떻게 취재하고 다니냐’ ‘뭐 힘든 일은 없냐’ 이런 식이다. 회사 얘기 좀 물으니 뜬금없이 ‘라쿠라쿠폰’을 아냐고 반문한다. 후지쯔가 대 히트친 휴대폰인데 그냥 ‘SAND’와 ‘END’만 있는 편한 휴대폰이란다. 용도와 목적에 맞게 IT가 활용돼야 한다는 한마디로 자기 회사 설명을 끝내 버린다.
상대 졸업반 시절 컴퓨터는 커녕 자판도 못 두드리던 김 사장이었지만 당시 최고의 외국계 기업인 한국후지쯔에 입사한다. 이 조직에서 28년째를 맞은 그가 지난 21일부로 대표이사 사장으로 취임했다. 2005년 4월 박형규 전무와 공동 대표 체제를 맡은 지 2년여만이다.
◇후지쯔와의 인연 시작되다=1954년 경상북도 고령에서 4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김 사장은 73년 경북대 경영학과에 진학해 학교를 마쳤다. 대학을 졸업한 80년 1월 그의 첫직장이 바로 한국후지쯔였다.
후지쯔 입사 과정은 우연의 연속이지만 오늘의 그가 있게 하기 위한 필연이었나 보다. 김 사장은 당시 대학교수와 외국계 기업 입사, 이 두 가지가 희망이었다. 마침 친구가 서울로 입사시험을 보러 가게 돼 후지쯔 입사 지원을 부탁하게 된다. 시험을 앞둔 그 친구가 서울역에서 내려 바로 앞에 보이는 대우빌딩 한국후지쯔에 뛰어가 김 사장의 입사지원서를 대신 써 냈고 희망부서는 대충 동그라미 쳤다고 한다. 그 부서가 소프트웨어(SW) 연구개발본부였단다.
‘친구따라 서울 온’ 김 사장은 한동안 헤맸지만 이내 적응하게 됐다고 회고한다. 공교롭게도 본부에서는 한글처리체계를 위한 SW 알고리듬 개발 프로젝트를 막 시작하던 때여서 그에게 ‘운’도 따랐다. 영어로만 돼 있는 컴퓨터에 한글 자모 체제를 도입하기 위한 연구팀에 참여, ‘한글 완성형’으로 1만300자를 개발했다. 완성형인 만큼 표준 글자를 만들기 위해 국회 도서관과 신문사 등을 찾아가 자료를 수집하고 조언을 듣기도 했다. 입사 13년만인 93년 SW기획부 부장을 맡았고 프로덕트 사업 추진 실장을 거쳐 99년에는 이사로 승진했다.
◇논리에 문제가 없다면 망설이지 마라=김 사장은 바둑을 즐긴다. 그의 실력은 온라인에서 아마 5단이니 아마 실제로는 한 3단 쯤 되는 모양이다. 이 정도면 그의 성격이 매우 느긋하고 여유있을 것 같지만 사실은 ‘급한’ 편이다. 바둑도 의외로 빨리 둔다.
“논리적으로 문제가 없다면 망설일 이유가 없죠. 임원이 되면서부터는 좀더 신중히 생각하고 움직이려고 노력해왔어요. 성질이 급하다고 지적하는 사람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의사결정이 신속하다고 말해주는 사람도 있어 그나마 다행입니다.”
그의 이런 성격은 직원 통솔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전문가’로서 담당자 역할을 분명히 해주기를 직접 주문하는 스타일이다.
그에게 ‘만약, ∼할 경우’ 등과 같은 가정은 통하지 않는다.
“이런저러한 대안이 있다며 윗선에서 결정하라는 얘기는 결국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빌미 아닌가요. 담당자가 권한을 가진 전문가로서 ‘이 안이 좋다’고 말하고 그 이유를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김 사장은 사내에서 집중력이 강한 인물로 정평이 나 있다. 이에 대해 한 임원은 “입사 이후 SW 개발 부분에서 근무할 때는 밤샘 작업을 하기 일쑤였으며 임원이 돼서도 8∼9시간을 꼼짝도 않고 보고서를 만들 정도로 집중력이 뛰어나다”고 말한다.
입사 후 우연히 얻은 3개월 간의 일본 파견출장 기회에 일본어를 마스터할 수 있었던 것도 유명하다. 예전부터 일본어를 배우기 위해 한국에 출장나온 후지쯔 본사 엔지니어를 데리고 용인민속촌 등을 찾은 횟수가 50여회가 넘을 정도로 지극했던 그의 열정이 뒷받침된 것은 물론이다.
◇다시 열정을 끌어내자=올해 초 후지쯔 본사는 일본을 제외한 해외 매출 확대를 위해 ‘비전 2009’를 발표했다. 단독 대표로서 그의 책임이 더욱 막중해졌다. 딱딱한 얘기 하지 말자던 김 사장은 “안경수 회장 시절부터 다져온 비즈니스 기반을 바탕으로 제2의 비상을 위해 심혈을 쏟을 것”이라며 비전 2009 이후의 장기 비전 마련에 나설 것을 시사했다. 지난 주에는 일본 본사를 방문, 단독 대표로서의 조직 및 사업 개편 등에 대한 계획을 세웠다.
국내에서 후지쯔하면 노트북, 서버 등을 공급하는 하드웨어(HW) 전문업체로 인식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김 사장의 생각은 다르다.
“매출의 50%가 이미 서비스 쪽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4000억원대 매출 중 2000억원이 IT 서비스 부문 매출이라며 김 사장은 한국후지쯔 역시 이미 서비스 시장에서 서열을 다투는 서비스 전문업체라고 강조한다.
그의 목표는 더 크다. 삼성SDS, LG CNS, SK C&C와 같은 토종 IT 서비스 업체들이 주름잡는 국내시장에서 ‘글로벌 후지쯔’의 명성을 달성하고 싶다고 한다. 현재 세계 IT 서비스 시장의 1위는 EDS, 2위는 IBM이고 그 뒤를 후지쯔가 잇고 있다. 김 사장은 국내서도 세계시장 판도와 같이 3대 서비스 업체로 한국 후지쯔를 등극시키겠다는 포부다.
목표 달성은 아직 멀어 보인다. 2년여의 적자 끝에 지난해 겨우 흑자로 돌아섰다. 올 상반기 실적도 소폭 흑자다. 그는 “이제 HW 위주의 비즈니스에서 서비스와 솔루션 위주로 옮겨갈 것”이라고 설명했다. 새로운 동력에 대해서는 “현재 검토가 끝나지 않았지만 인수합병(M&A) 등을 통해 신사업 진출하는 것도 적극 검토하고 있다”면서 “한국 후지쯔의 변신은 이제 시작”이라고 말했다.
▽김병원 사장 프로필
1954년 10월 13일 경상북도 고령에서 태어난 김 사장은 한국 컴퓨터 산업의 산증인으로 꼽힌다. 태동기 때 한국후지쯔에 들어가 지금까지 외길만 걸어왔다. 한글 자모 체제 개발과 자판 배열방식 창안 등 컴퓨터 산업의 성장 과정에 적잖게 기여해 왔다. 73년 대구 대건고를 졸업하고 그 해 경북대학교 상과대학 경영학과에 입학, 80년 졸업했다. 같은 해 한국후지쯔 OS부에 입사해 93년 소프트웨어기획부 부장, 94년 마케팅부 부장 겸 네트워크사업부 부서장을 맡았다. 이후 99년 이사로 승진하며 PC사업부·스토리지사업부·전략기획실 총괄을 거쳐 2005년 공동 대표이사 전무, 올 8월 21일자로 단독 대표 사장으로 승진했다. 성주 출신의 부인 최유정(50) 씨와의 사이에 1남1녀를 두고 있다.
명승욱기자@전자신문, swm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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