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신요금, 경쟁 통해 낮췄다](6)선불카드의 나라-­이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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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교통의 중심인 로마 테르미니역. 늘 붐비지만 여름을 맞아 관광객들로 넘쳐났다. 역건물 2층에 위치한 1위 사업자 TIM 매장에는 2명의 점원들이 20여명의 고객을 상대하느라 땀을 뻘뻘 흘리고 있다. 매장을 찾는 40∼50%는 다른 나라에서 여행온 관광객들이다. GSM 방식의 서비스라 SIM카드만 교체하면 통화가 돼 짧은 기간에 쓸 선불카드를 구매하는 여행객들이 늘 줄을 선다. 지하에 있는 스리 매장도 다르지 않았다. 하루 200∼250명이 방문해 100명이 구매·계약하고 간다. 매장 점원 지올레오는 스리가 3위 사업자로 올라서는데 이 매장이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며 자랑을 감추지 않는다. 이탈리아는 인구 5800만명에 이동통신 가입자가 무려 8300만명이다. 망내 할인 효과를 누리기 위해 한명이 2∼3개의 이통사에 가입하면서 1인 2휴대폰이 정착한 선불카드의 나라다.

◇ 선불카드가 90% 차지=모든 남자들은 축구클럽에 가입하고, 동네마다 잔디구장이 있는 축구의 나라. 영국 훌리건 뺨치는 열정적이고 다혈질적인 이탈리아인의 기질은 이동통신 시장에 그대로 나타난다. 꼼꼼히 따져보고 오랜기간 계약하는 정액제는 10%에 불과하다. 유창준 LG전자 유럽본부 과장은 “이탈리아 사람들은 계약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해 분당 요금이 다소 높더라도 선불카드를 선호한다”고 전했다. 이탈리아의 선불카드 점유율은 전체 이통 가입자의 90%에 이른다. 정액제 비중이 60%를 넘어선 영국이나 70%에 가까운 프랑스와 대조적이다.

◇ 휴대폰 2∼3대 보유도 많다=저렴한 휴대폰 가격, 선불카드의 확산은 이탈리아 이동통신 가입률을 140%까지 올려놓았다. 무엇보다 다른 통신사간 통화요금이 높은 반면 같은 가입자끼리의 요금은 저렴해 1인 2휴대폰은 물론 심지어 1인 3휴대폰도 적지 않다. 리보르노에 거주하는 타마라 모리덴티(30)는 TIM과 보다폰 가입자다. 처음에는 TIM만 썼는데 자주 통화하는 남자친구가 보다폰을 쓰고 있어 요금을 아끼려고 보다폰에 새로 가입했다. “TIM만 쓸때는 요금이 한달에 90유로(11만5000원) 가량 나왔는데 두개를 쓰니 60유로(7만8000원) 정도로 줄었다”며 “주변에 이 같은 사람이 많다”고 전했다. 비즈니스맨인 쥬세페 디바리(42)씨는 업무를 위한 음성통화용으로는 TIM을, 가족과 친구들과의 화상통화용으로는 스리를 쓴다. 2020년에는 이탈리아 인구 대비 완전한 1인 2휴대폰, 즉 1억2000만 가입자의 시대가 올 것이라는 전망도 나왔다.

◇ 이통사업자의 천국=높은 가입률, 선불카드의 정착 등은 이통사업자들에게도 최고의 사업여건을 제공한다. 1위 사업자인 TIM의 가입자는 무려 3300만명, 2위 보다폰은 2600만명이다. 이들 업체의 EVITA 마진은 무려 50%에 육박한다. 세계 최고 수준이다. 이탈리아의 1인당 월 이용량은 127분으로 우리나라 303분을 크게 밑돌지만 분당 평균요금수익은 0.18달러로 우리나라의 0.12보다 훨씬 높다. 무엇보다 선불카드가 가져다주는 효과다. 윈드의 고객마케팅 매니저인 마우로 아크로질리아노는 “선불카드는 사업자들에게 아주 매력적인 모델”이라며 “팔리는 순간 이미 수익을 다 올렸기 때문에 이후 다양한 마케팅을 할 수 있는 기반이 된다”고 말했다.

◆소비자 배려에 앞장서는 이탈리아 정부

지난 4월 3일. 이탈리아 이동통신 시장에는 큰 변화가 있었다. 그동안 모든 선불카드에 부과해온 20% 가량의 세금이 사라진 것이다. 가령 그동안 10유로짜리 선불카드를 충전하거나 구매할때 그 중 2유로를 세금으로 내야했지만 폐지됐다. 이는 인터넷이나 TV서비스를 위한 선불카드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다만 정액제 요금은 해당되지 않는다.

이 같은 비용이 사라짐에 따라 이용자들의 선불카드 요금도 20% 인하되는 효과가 날 것이라는게 현지 언론 보도다. 정부의 이 같은 방침은 다른 유럽 국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EU의 위원회에서도 선불카드시 부과되는 유사 비용을 폐지하라는 권고를 내렸다.

이탈리아 정부가 이 같은 방침을 결정한 배경이 흥미롭다. 휴대폰 가입자들이 이미 많은 세금을 냈기 때문에 더 이상 내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깔려있다. 소비자의 이익에 정부가 직접 개입하는 드문 경우다. 게다가 사업자들이 세금을 요금에 반영하면서 임의로 요율을 올리거나 부당하게 추가 과금을 했던 관행에 대해서도 철퇴를 내렸다. 이외에도 이탈리아 정부는 현재 12개월로 돼있는 선불카드의 유효기간을 폐지하고 소비자들이 명확하게 요금을 알 수 있도록 사전 공고와 계약사항 충실의 의무를 사업자들에게 부과했다.

하지만 이탈리아 정부도 사업자 요금에는 개입하지 않는다. 윈드의 한 관계자는 “정부가 사업자들의 요금에 개입하지 않고 다양한 방식으로 소비자 혜택을 높이는데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빅3 경쟁이 공격적인 요금제 불러

지난 봄은 이탈리아 통신사업자 윈드에게 충격적인 시간이었다. 98년 설립돼 TIM·보다폰과 함께 오랜기간 3대 사업자 지위를 누려왔으나 올들어 3위 자리를 신생업체인 스리에게 내주는 치욕을 겪었기 때문이다. 마우로 아크로길리아노 윈드 마케팅담당 매니저는 “잊을 수 없는 충격”이라고 말한다.

홍콩 허치슨 계열의 스리는 이탈리아 시장에 2004년 진출해 3년만에 3위 자리를 꿰찼다. 영국에서도 한바탕 요금경쟁을 불러일으킨 스리의 주무기는 3G 영상통화가 아니라 저가 요금제였다. 3년만에 유치한 가입자만도 1000만명 안팎이다. 선불카드 시장의 특성을 감안한다 해도 우리나라 LG텔레콤이 10년에 걸쳐 유치한 가입자보다 훨씬 많다.

스리가 시장을 잠식해오자 1위 사업자 TIM과 2위 보다폰이 되레 더 파격적인 요금제를 내놓으면서 경쟁을 주도했다. 부부가 살 경우 단말기 1대 가격만 받는다거나 이용량이 많거나 유선전화 수신시 일정 부분을 다시 환급해주는 마케팅도 활발하다. 3위를 두고 윈드와 스리가 저가 요금제로 접전을 벌이고, 가입자를 유지하기 위해 TIM과 보다폰이 방어 요금제를 내놓으면서 이탈리아 사용자들의 선택폭이 훨씬 커진 셈이다.

앞으로 요금경쟁은 더 치열해질 가능성이 크다. 윈드가 3위 탈환을 위해 공격적인 요금제를 선언했기 때문이다. ‘3위 탈환을 위해 따라올 수 없는 요금제를 내놓는다’는 게 윈드 마케팅의 대원칙이다. 3유로만 내면 지정번호 3∼5개에 대해 400분 무료통화를 제공하거나 5유로에 한달간 모든 윈드 번호에 대해 무제한 전화를 걸 수 있는 옵션제도 있다. 전화를 자주받는 사람들을 위해 금액을 돌려주는 피아노윈드 요금제는 아예 사용자를 묶어두기 위한 고육지책이다. SMS 1건당 발송요금은 15센트(300원)이지만 2유로를 내면 1달 4000개 SMS를 무료로 주거나 3유로를 추가하면 단가를 6센트로 낮춰주는 요금제로 내놓고 있다.

◆취재후기-­그렇게 싸지는 않았다

 ‘7유로를 내면 한달간 쓴 요금을 다 돌려드립니다.’ 로마의 이동통신 매장에는 이 같은 파격적인 광고문구들이 넘쳐난다. 최장 한달씩 휴가를 가는 이탈리아 문화를 반영하듯 여름 시즌을 겨냥한 스페셜 패키지들이 쏟아졌다. 10유로로 망내 500분 통화와 SMS 500건을 무료 제공하는 경우도 있다. 우리나라와 비교할 수 없이 저렴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철저한 마케팅 기법에 불과하다. 같은 이통사내 요금은 저렴한 대신에 다른 이통사로 걸때는 선불카드의 경우 분당 15∼19센트(180∼240원)로 비싸다. 또 한정상품이어서 여름시즌이 지나면 없어진다. 되돌려주는 혜택도 현금이 아니라 통화량이다. 한달간 음성통화 무료 500분 같은 것들이다. 이탈리아인들의 1인당 월 통화량은 127분에 불과하다. 500분을 주어봐야 제대로 쓰는 사람도 없다. 뷔페에 갈 때 무작정 먹겠다고 했지만 실제론 얼마 먹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탈리아인들이 연간 지출하는 1인당 통신비는 무려 600달러에 이른다. 파격적인 요금제 뒤에는 사업자들의 교묘한 마케팅이 숨어있다.

로마(이탈리아)=조인혜기자@전자신문, ih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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