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단의 순간들]이세한 지티앤티 사장(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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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군자동 사옥시대를 열었다. 내외빈과 함께 개업식에서 테이프커팅을 하고 있는 필자(왼쪽부터 세번째).

(2)자체 사옥 시대를 열다

 회사 설립 초기, 무선호출 수신율 분석장치를 개발한 것은 우리 나름대로 큰 의미가 있었다.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제품인데다 상용으로 납품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노력만큼 결실을 거둔 것은 아니다. 기술력만 자신이 있었지 수요처 요구사항을 100% 반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첫 개발 제품인만큼 소중한 경험이었다.

 회사 경영 노하우도 조금씩 쌓여갔다. 96년에는 이 같은 자신감을 바탕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바로 무선호출기지국 운용업무에 뛰어들었다. 처음에는 국내 최대 이통사인 A사의 수도권지역 일부 업무를 시작했지만 나중엔 수도권 전체, 전국 무선호출기지국 운용업무도 맡게 됐다.

 당시 서울통신기술·흥창·제일정밀 등과 경쟁했다. 서울통신기술은 삼성전자 인력과 기술을, 흥창·제일정밀은 상장사 등 나름의 경쟁력을 갖춘 기업이었다. GT&T만 업력도 짧고 기업공개(IPO)도 못한 중소기업이었다. 당연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낮에는 영업 일선에서 뛰는 등 회사업무를 보고, 밤에는 제안서 작성하는 일에 매달렸다. 회사 운영의 전환점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하루 4시간 이상을 잘 수 없었다. 결과는 좋았다. 다행히 A사는 GT&T가 제안한 가격과 기술지원이 뒷받침된 품질 개선안을 채택했다.

 정기적인 매출 기반이 생기자 97년부터는 더욱 자신있게 개발 업무를 추진할 수 있게 됐다. 이동통신 중계기용 모듈 개발에 착수한 것도 이 시기다. 우선, 극초소형 중계기 개발에 들어갔다. 또 사업 초기 개발한 무선호출 수신율 분석장치에 대한 개선작업도 추진했다. 모두 일이 순조롭게 진행됐다. 개발작업을 이내 성과를 거뒀다. 대부분 1∼2년에 마무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매출도 매년 100% 이상 성장했으며 순익도 이에 비례했다. 97년 10억원 수준이던 매출이, 98년 26억원, 99년 54억원, 2000년 154억원 등으로 성장했다. 매출이 늘면서 자연히 회사 인력도 증가했다. 10명도 안 됐던 인력이 20명, 40명, 60명 등으로 늘어났다. 회사의 외형이 커지고 이익 규모도 늘어 그야말로 성장에 탄력이 붙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도 그때는 기분 좋은 성장의 시기였다. 우리의 노력도 노력이었지만 시장의 흐름이 내 편이 돼 줬기 때문이다. 유선통신 중심의 시장이 이동통신으로 전환되면서 이동통신사들이 투자 확대에 열을 올렸다. 당연히 사업은 시장 확대의 흐름을 타고 순항에 순항을 거듭했다.

 회사가 안정적인 성장세를 탔을 때 새로운 준비를 해야 한다고 믿었다. 새로운 사업을 하기 위해서는 투자자금의 확보가 문제였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IPO가 답이었다. 2000년, 마침내 코스닥 상장을 결심했다. 당시 코스닥 상장 붐이 한풀 꺾이기는 했으나 GT&T의 실적으로 보면 충분했다. 증권사 담당역과 상담 이후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됐다. 이듬해 LG투자증권을 주간사로 하고 유상공모를 실시했다. 공모가는 액면가보다 5배가 넘는 주당 2600원이었다.

 투자 재원이 확보되자 곧바로 신규 제품 개발에 매진했다. TMD·프레시 비콘·3채널 중계기 등을 잇따라 개발하기 시작했다. 연구개발 조직의 확충으로 서울 구로 디지털단지에서 3개 사업장으로 나뉘어 운영되면서 불편한 것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일관된 연구개발 체계를 갖추기 위해 사업장 통합이 절실히 요구됐고 이를 위해 사옥을 마련키로 마음을 굳혔다. 개발실·실험실 등 연구체계와 관리체계를 위해서는 이를 위한 공간 마련도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리저리 알아본 결과 마침 군자동 주변에 건물이 나왔다는 얘기를 듣게 됐다. 군자동 대로변의 지하 1층, 지상 6층 빌딩이었다. 우리 회사 규모의 인력이 활용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마침내 자체 사옥시대를 열었다.

 sehan@gt-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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