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년간 정부와 민간이 총 2800억원을 투입해 국산화한 한국형 고속철도가 입찰과정의 공정성 문제로 논란이 일고 있다. LS산전이 개발한 고속철 제어장치(차상신호시스템)가 입찰 기회도 얻지 못한 가운데 프랑스 제품이 채택됐기 때문이다. 이 과제는 고속철 국산화의 핵심과제 중 하나다. 발주사인 로템 측은 기술적인 선택이었다고 설명하지만 LS산전은 애써 개발한 국산기술을 사장시키는 횡포라고 반발하고 있다.
갈등의 뿌리는 지난 96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당시 건교부는 고속철도기술을 국산화하자는 취지로 G7사업을 시작했고 LS산전(차상신호시스템)·로템(차체)·현대중공업(모터블록) 등이 핵심부품 국산화를 각각 맡았다. 그 결과 지난 2005년 한국형 고속전철의 시제차량인 HSR-350X가 완성됐고 350㎞/h 시험주행까지 통과하는 등 성공적으로 프로젝트를 마친 바 있다.
문제는 호남고속철(KTX-Ⅱ) 주계약자로 선정된 로템이 차상신호시스템을 입찰하면서 LS산전을 배제한 채 지난달 프랑스 CSEE사와 도입 계약을 해버린 것. LS산전은 총 118억원을 투입해 필드 테스트까지 성공한 차상신호시스템이 입찰도 못하고 사장될 위기에 처했다며 불만이다. 로템 측은 KTX-Ⅱ에 들어갈 제어장치는 자체 성능뿐만 아니라 기존 열차구간에 채택된 보급형 제어시스템(ATP)과 호환성, 이중 안전장치 등 새로운 부가기능이 필요한데 LS산전 제품은 이 같은 조건에 미달했다고 반박한다.
국책과제로 개발한 국산제품이 당초 계획한 성능을 만족시켜도 실제 수요자가 요구하는 다른 기능을 지원하지 못하면 살 수 없다는 논리다. 고속철사업의 감독기관인 철도공사와 건교부의 담당자들도 이번 사안은 로템이 결정할 기술적 문제라며 팔짱만 끼고 있다.
LS산전은 지난 10년간 고속철 국산화를 함께 추진해온 로템이 막판에 자사 제품만 배제한 진짜 속내에 대해 의혹을 제기한다. 고속철 차량제작사인 로템 측이 향후 차상신호시스템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 경쟁 제품의 싹을 자른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여하튼 국산 고속전철의 두뇌격인 차상신호장치의 국산화는 물 건너간 것으로 보인다.
전 세계 5개 회사만이 보유한 고속철 제어기술을 우리 손으로 만들려던 노력이 땅 속에 묻히는 셈이다. 정부는 개발이 완료된 한국형 고속철도(G7)에 이어 최고시속 400㎞의 차세대 고속철도 개발을 올해부터 추진할 계획이다. 하지만 국책과제로 개발한 국산부품마저 입찰조차 못하고 사장되는 판국에 어느 기업이 시간과 돈을 투자할지 의문이다.
배일한기자@전자신문, bail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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