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풋(In-put)과 아웃풋(Out-put).’
글로벌 경영자 안경수 후지쯔그룹 아시아태평양(APAC) 지역 총대표(55)가 정해년 새해에 던지는 메시지는 한 마디로 ‘생산성’이다. 결과가 나오는 ‘예측 경영’을 해야 한다는 것. 투자에 앞서 성과를 계량화하고 먼저 내다볼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사실 이는 ‘경제학 1장’에 나오는 아주 평범한 ABC 경영이론이다.
하지만 특히 안 총대표의 말에 힘이 실리는 이유는 그가 이를 실전에서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경영 교과서에 나오는 이론을 머리로 암기한 경영자와 ‘180도’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경영의 출발은 단순함에서 시작합니다. 단순함을 달리 이야기하면 ‘기본’입니다. 아무리 허울 좋은 경영 기법이더라도 기본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사상누각입니다. ‘인풋-아웃풋’ 경영 논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꼭 수익이 나야만 투자한다는 식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업·국가 모두 ‘승산 없는 게임’이 반복되면 성장을 담보할 수 없습니다. 잠재 시장을 겨냥한 선행 기술 투자도 특정 기업에는 비록 손해일지 모르지만 전체 국가나 산업·시장에 도움이 된다면 ‘오케이’입니다.”
후지쯔그룹의 아시아태평양 ‘지역 사령관’격인 안 총대표는 경영이든, 인생이든 이 논리에 충실하면 결코 실패할 수 없다고 자신했다. ‘실행’. 바로 안 총대표의 글로벌 경영자로 첫째 경쟁력이다.
컴퓨팅그룹으로 잘 알려진 후지쯔는 전 세계적으로 직원 15만8000명, 매출 5조억엔, 500여 개 이상 자회사와 관계사를 거느리고 있다. 세계 3위 IT서비스 기업으로 포천 글로벌 500대 기업 절반 이상이 후지쯔 솔루션을 사용하고 있다. 후지쯔에서 안 총대표의 정식 직함은 경영 ‘집행역’ 상무 겸 APAC 총대표다.
“일본 본사 임원은 취체역과 집행역으로 나뉘는데 집행역은 단순한 경영 조언에 그치는 취체역과 다릅니다. 인사·행정을 포함해 경영에 필요한 전권을 휘두를 수 있습니다. 반면 그만큼 실적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합니다. 본사 직원을 통틀어 집행역 타이틀을 쓰는 임원은 20명 안쪽에 불과합니다. 집행역은 쉽게 이야기해 ‘한해살이’ 인생입니다. 경영 성과가 좋지 않으면 언제든지 옷 벗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안 총대표가 우스개처럼 이야기했지만 집행역은 철저하게 실적에 따라 희비가 엇갈린다. 다행히 지금까지 안 총대표를 ‘시험에 들게 한 사례’는 없었다. 오히려 기대 이상이었다.
지난 96년 한국후지쯔 대표이사로 부임한 이후 그는 끊임없는 경영 혁신을 통해 매년 30% 이상 고속 성장을 이뤄냈다. 2003년 본사에서도 이를 인정 받아 지난 1935년 후지쯔그룹이 생긴 이래 첫 외국인 임원으로 발탁됐다. 발탁된 후 본사 중역으로서 중간 성적표도 ‘A’ 이상이다.
후지쯔그룹은 전 세계를 북미·유럽·중국·APAC 4개 권역으로 나눈 책임 경영 체제를 시행하고 있다. 안 총대표는 집행역으로 한국을 포함해 인도·호주·태국·필리핀 등 APAC 11개 지역 경영 전반을 총괄하고 있다. 그는 지난해까지 언어와 문화가 다른 11개 국가를 이끌면서 한 번도 적자를 낸 적이 없다. 매출 성장 속도도 4개 권역의 평균 이상을 기록했다. 호주 같은 나라에서는 오히려 만년 적자를 흑자로 바꿔 놓았다.
“비결은 간단합니다. 현장에 답이 있습니다. 후지쯔는 기업 IT환경 구축을 위한 종합 서비스 회사입니다. 서버에서 PC·통신장비까지 다양한 제품을 갖추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제품이라도 고객의 가치를 높여 주고 고객 입맛에 맞아야 합니다. 그럼 먼저 각 지역 실정과 시장 상황을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안 총대표의 정식 사무실은 일본에 있다. 하지만 그가 일본에 머무는 기간은 한 달에 일주일이 채 안 된다. 한국에도 고작 2∼3일 일정으로 1, 2번 들른다. 나머지 기간에는 모두 11개 지역을 방문한다. ‘항공 마일리지 200만마일’ 글로벌 경영자로 그의 두 번째 경쟁력이다.
후지쯔그룹은 그동안 일본 시장이 주력이었다. 이제는 실질적인 글로벌 기업으로 변신을 꾀하고 있다. 2009년까지 해외 매출 비중을 50%로 확대한다는 비전도 발표했다.
“후지쯔는 새해가 글로벌화 원년입니다. 먼저 사업 측면에서는 핵심 플랫폼은 글로벌 표준을 따르면서 애플리케이션이나 디바이스는 고객 환경에 적합한 서비스를 제공할 계획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다른 아시아 기업의 세계화 지원에 적극 나선다는 전략입니다.”
일본과 산업이나 기업 구조가 비슷한 한국에 대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한국 IT산업은 메모리 반도체와 액정표시장치(LCD), 휴대전화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큽니다. 이들 분야는 경쟁이 매우 치열하지만 한국은 충분한 경쟁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당장은 한국이 선전하고 있지만 한쪽으로 치우친 감이 없지 않습니다. 일본처럼 부품과 장치 산업에 기반한 ‘피라미드 구조’를 구축해야 합니다.”
이와 함께 그는 글로벌 마인드를 강조했다. 기업이 글로벌화되려면 먼저 사람이 글로벌화되어야 하고 수 많은 글로벌 경영자가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글로벌 경영자의 덕목은 세 가지입니다. 먼저 ‘적응 능력’입니다. 언제 어떤 상황에도 바로 적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숫자 감각’입니다. 매출액이나 순익 등 각종 경영 지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히 파악해야 의사 결정을 합리적으로 할 수 있습니다. ‘균형 감각’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서로 다른 문화에서 기업을 가꾸려면 상대방의 말도 신중히 듣고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균형 감각이 필요합니다. 한 마디로 경영자나 사회 지도층은 ‘플래잉 코치’가 되어야 합니다. 비록 조폭 문화지만 위험이 생기면 누구보다 보스가 먼저 직접 나서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처럼 기업과 정치 지도자도 말과 실천을 겸비해야 합니다.”
안 총대표는 다행히 한국 기업은 ‘개방 모듈형(open & modular)’ 주도의 미국 기업 환경, ‘폐쇄 통합형(closed & integrated)’인 일본 기업의 장점을 모두 흡수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며 밝은 청사진을 숨기지 않았다. 또 일본 기술력, 한국 인적 자원, 중국의 풍부한 물적 자원을 하나로 모으면 전 세계 경제를 주도할 수 있을 것이라며 기회가 되면 한·중·일 아시아 3국의 IT 연합 구축을 위한 가교 역할을 해보고 싶다고 덧붙였다.
끝으로 인생 선배로써 후배들에게 당부도 빼놓지 않았다.
“흔히 글로벌 기업하면 외국어를 첫째 항목으로 꼽습니다. 물론 맞는 말입니다만, 이는 한국 내에서는 몰라도 전 세계에서 통할 지는 미지수입니다. 최근 친디아로 중국·인도가 급격하게 부상하고 있습니다. 영어 구사력과 시장 규모에서 열세인 상황에서 전 세계를 무대로 삼기 위해서는 남들보다 뛰어난 경영 능력과 리더십을 갖추어야 합니다. 결코 지금 가진 것에 만족하지 마십시오. 더 큰 것을 꿈꾸십시오. 좁은 한국을 넘어 더 넓은 세계를 상대로 자신을 시험해보시기 바랍니다.”
무한경쟁 시대, 기업에게 국경은 무의미하다. 기술과 상품도 쉼없이 바뀐다. 결국 남는 건 사람이다. 넓은 세계와 시장을 꿈꾸는 경쟁력 있는 인재만이 미래 IT코리아의 최대 자산일 수 밖에 없다.
글로벌 경영자로 우뚝 선 안경수 총대표의 가장 큰 경쟁력은 ‘꿈’ 즉 ‘목표’다.
강병준기자@전자신문, bjkang@
◆안경수 회장은…
안경수 총대표 명함에는 두 가지 직책이 동시에 새겨져 있다. 후지쯔 본사에서 부르는 ‘아시아·태평양지역(APAC) 총대표’와 ‘한국후지쯔 회장’이다. 지금은 본사 경영총괄 집행역으로 11개 지역 후지쯔 법인을 관리해 지역 회장 직함은 큰 의미가 없지만 안 총대표는 여전히 이를 고집하고 있다. 자부심 때문이다. 전 세계 16만명 후지쯔 직원 중에서 열 손가락 안의 위치에 오르기까지, 그 출발점이 바로 한국후지쯔였다. 올해로 한국을 떠난 지 벌써 수 년이 흘렀지만 국내에서는 여전히 ‘후지쯔=안경수’라는 등식이 유효하다.
안 총대표는 미국 스탠퍼드대학 연구원을 거쳐 대우에서 사회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다우기술을 창업해 공동 대표를 맡은 후 삼성그룹 회장 비서실을 시작으로 10년 가량 ‘삼성맨’으로 지냈다. 삼성 PC사업본부장을 마지막으로 삼성을 접고 삼호물산 사장, 효성그룹 부사장을 거쳐 96년 사장으로 후지쯔와 첫 인연을 맺었다. 안 총대표는 후지쯔의 한국 사령탑으로 2003년 경영 집행역으로 본사 VIP로 발탁되기까지 숱한 기록을 남겼다.
IMF로 어려웠던 97·98년 연평균 매출 30% 성장을 이끌며 취임 6년 만에 무려 다섯 배의 성장을 기록, 후지쯔를 국내 컴퓨팅 글로벌 ‘빅5’에 진입시켰다. 지금까지도 후지쯔 본사를 통틀어 이런 경영 성과를 올린 것은 안 총대표가 유일하다. 아직도 후지쯔그룹의 ‘살아 있는 전설’로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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