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단의 순간들]이주용 KCC정보통신 회장(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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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IBM의 한국진출 초기에 프린터 앞에서 작업을 확인하고 있는 필자.

(3)IBM의 한국대표로 귀국

 나는 IBM 본사에서 온 부사장 일행과 주한미국상공회의소를 시작으로 미국대사관·경제기획원 장관·상공부 장관·체신부 장관을 비롯 당시 내각 및 최고 회의보다 권력이 강한 한국중앙정보부까지 가리지 않고 방문했다. 여러 부처 사람들과의 대화는 부정적으로 시작하다가 마지막 순간에 극적인 반전이 이뤄져 IBM의 한국 진출이 결정됐다.

 사실, 당시 IBM이 한국에 진출하지 않았다면 한국의 정보화는 상당히 늦어졌을 것이라 생각되기에 그때 여러 부처의 담당자들을 만나는 과정에서 도움을 주었던 분들께 무척 감사하다.

 그 후 나는 IBM의 한국 대표로 파견 나와 IBM의 한국 진출을 타진하는 임무를 맡게 됐다. 임무 중 하나가 100만 달러에 달하는 IBM 컴퓨터를 기증할 적당한 학교를 선정하는 것이었다. 당시 한국에서 컴퓨터에 대한 인식 부족으로 IBM을 여행사로 간주(당시 알파벳 세 글자 회사는 대부분 여행사였음), 유수 대학 총장과의 면담조차 거절 당했고 관심을 보였던 연세대와도 학술용이 아닌 일반 상용 업무에 이용한다는 대학 측의 계획에 의해 기증 프로젝트가 무산되고 말았다.

 심지어 어떤 학교는 “컴퓨터보다 그냥 현금으로 줄 수는 없냐”고 해 실망스럽기까지 했다. 나중에 이 일은 두고두고 생각할수록 안타까운 일이었고 당시의 나의 경륜이 부족했음을 탓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은 본 업에 착수, 컴퓨터를 사용할 만한 기관을 선정해 활용 의사를 조사하는 것인데 이를 위해 각 기관의 담당자들을 만나기 위한 문턱은 한층 더 높았다. 이때 전에 친분이 있었던 미8군의 말로이 사령관이나 마이어 부사령관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당시 안타까운 점은 정부 관계자들이 미국인과 함께 가면 뭔가 대단한 배경이 있는 것처럼 인식한 것이다. IBM PCS 기계를 관리하기 위해 본사에서 파견된 하워드란 직원이 있었는 데 내 말 보다는 이 친구 말을 정부 관계자들이 더 귀 기울여 주는 것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친구는 나를 모함하기도 하고 국군 전산화 프로젝트를 진행할때 나에게 잘못된 정보를 제공, 어려움을 겪게 만들기도 했다. 그로서는 IBM의 한국 대표 자리가 탐이 났기 때문이리라.

 국군 전산화 프로젝트로 타격을 입은 나에게 설상가상으로 치명타를 안긴 사건이 바로 경제기획원 통계국 사건이었다. IBM 대표로 통계국에 가끔 들르곤 했는 데 그럴 때마다 통계국 실무자들이 이런저런 불만을 늘어놓았고 나는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여 도쿄와 하와이에서 전문 인력들을 불러와 연석회의를 주관했다. 그런데 막상 회의자리에서 통계국 사람들은 전혀 불만이 없다는 식이어서 한마디로 말해 한국 사람인 내가 한국의 기업 문화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송두리째 드러내 버리고 만 것이다. 이 사건이 결정적으로 작용, 나의 업무 수행 능력은 치명타를 입었고 한국 책임자로서 내가 적임이 아니란 얘기가 나돌았다.

 결국 이듬해 1964년 1월 난 IBM의 입장보다 한국에 대한 애국심에 근거해서 일을 추진한다는 지적을 받고 하워드에게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하지만 나중에 하워드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뒷통수를 맞고 쫓겨났으니, 그래서 세상일은 돌고 도는 모양이다.

안수민기자@전자신문, sma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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