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146년 세계에서 가장 거대했던 도시 중 하나인 카르타고가 무너질 때 그 상황을 만들어낸 장본인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는 쓸쓸한 표정으로 ‘언젠가 로마를 방문할 운명’에 대해 슬퍼했다고 한다. 그리고 600여 년 뒤 그의 말을 입증하듯 로마 역시 암흑시대 그 긴 서막을 화려하게 알리면서 야만족의 발길 앞에 불타올랐다.원숭이들에 의해 지배되는 행성에 도착한 우주 탐사대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가 있다. 말하는 원숭이들에 잡혀 혹사당하던 그들은 결국 탈출하지만, 행복으로 가득해 보이는 결말에서 영화는 모래 밑에 반쯤 묻힌 자유의 여신상을 보여준다. 이제껏 외계인들의 세계라 알고 있었던 그 곳이 사실은 멸망해 버린 지구였다는 것을 입증하는 증거를….
“오 이럴 수가! 내가 돌아왔어. 내가 고향에 있는 거야…, 이 망할 놈들!” 자신이 없는 사이 세상을 멸망시킨 누군가에 대한 절규 속에 막을 내리는 이 영화는 냉전이 극에 달하던 1968년 ‘혹성탈출’이라는 이름으로 모습을 드러내 절망으로 가득한 그리고 저주 속에 마감되는 그 마지막 반전을 통해 전 세계에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다.
‘SF’는 미래의 이야기지만 그것이 항상 밝다고 그 누구도 말할 수 없다. 원숭이에 의해 지배되는 행성 그리고 카르타고, 로마가 멸망하고, 암흑시대가 세상을 뒤덮었듯이 말이다.
“보라, 난 도둑처럼 나타나리니, 왕들을 하르마게돈으로 모으리라.”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성경의 마지막 부분엔 이렇듯 충격적인 멸망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요한 묵시록이라는 이 글은 이제껏 많은 곳에서 인용됐지만, 종말의 장소인 하르마게돈(아마게돈) 만큼 영화 제목이 될 정도로 깊은 인상을 준 것은 없었다. 1990년대 세기말을 맞이해 세상에는 수많은 멸망론이 나돌았다.
이제껏 소개된 모든 이야기가 다시 회자되곤 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참신하고 충격적인 것은 역시 6500만 년 전 공룡들이 그러했듯 거대한 소행성에 의해 인류가 멸망한다는 이야기다.
하늘에서 떨어진다는 재앙이라는 점에서 ‘하나님의 불’이나 노스트라다무스가 말한 ‘공포의 대왕’을 연상케 한 이 소재는 1998년 ‘딥 임팩트’, ‘아마게돈’이라는 두 개의 영화로 제작되었다. 지구를 향해 다가오는 소행성들로 시시각각 멸망이 다가오는 가운데, 소행성이 충돌하는 순간의 충격적인 장면은 세계를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모든 헐리우드 영화들이 그렇듯 영화는 해피엔딩으로 즐겁게 마감하지만, 지금도 지구 주변에는 수많은 소행성이 넘치고 있다는 점에서 어쩌면 현재 진행형일지도 모른다.(최소한 우리들에겐 사과나무를 심을 시간은 있을지도 모르지만….)헐리웃판 ‘아마게돈’이 소행성이라는 자연 재앙을 다루고 있다면,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던 이현세씨의 ‘아마게돈’은 외계인의 침략을 소재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저항할 수 없는 힘을 지닌 강대한 외계 생명체가 세계를 유린하는 이야기다.
H.G.웰즈의 ‘우주전쟁’에서 시작된 외계인 침략 얘기는 지구인을 잡아먹는 파충류 외계인들이 침략하는 외화시리즈 ‘V(브이)’ 등 여러 작품으로 연출되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충격적인 것은 ‘인디펜던스 데이’가 아닐까?
달의 4분의 1에 달하는 거대한 모선과 한 순간에 도시를 밤으로 바꾼 직경 10km의 비행접시가 등장하는 이 작품은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이나 백악관을 사정없이 날려버리는 연출로 신선한 분위기를 준다. (이와는 달리 ‘사이언톨로지’의 창시자인 론 허버드 원작의 ‘배틀필드 어스’에서는 인류가 이미 멸망한 것으로 묘사된다.
이 작품에서 ‘사이클로’라는 외계인들은 단지 금을 얻기 위해 독가스 한방으로 인류를 쓸어버렸고 얼마 안 되는 생존자들이 원시인처럼 생활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는 먹이나 자원을 얻으러 오는 외계인들에 대항해 싸우고 멸망의 위기에 처해야 하는 것일까? 여기 -다른 것과는 구별되는- 하나의 해답이 있다.
읽기 어려울 정도로 긴 제목을 가진 작품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서 모든 이야기는 단방에 지구가 사라지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것도 ‘우주 도로 건설에 방해가 된다.’는 지극히 사소한 이유로 말이다.허망하기 이를 데 없는 결말이지만, 어쩌면 이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이런 건 우리 잘못이 아닌데다 무엇보다 멸망은 한 순간에 찾아올 테니까. 하지만, 우리 스스로 자처한 저주받을 미래는 다르다.
핵전쟁이나 생물병기, 그리고 환경 재앙 같은 문제와는 문제의 차원이 다른 것이다. 핵전쟁을 생각해보자. 우선 ‘터미네이터 2:심판의 날’에서 핵폭발로 인한 멸망은 순식간에 찾아오는 것처럼 묘사되지만 사실 그 멸망은 아주 길고도 오랫동안 그리고 괴롭게 지속된다.
‘그날 이후(The Day After)’란 작품에선 “핵전쟁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살아남았다. 방사능이라는 치명적인 독이 가득한 세계에서…, 그리고 그들은 하나 둘 죽어간다. 후손에게 기형이라는 끔찍한 질병을 남기고….”라며 슬픈 종말을 담담하게 묘사한다.
그래도 핵병기는 조금 나은 편이다.
캡콤의 명작 ‘바이오 하자드’에선 생물병기로 인해 조금 전까지 평범했던 인간이 좀비로 변하여 인간을 습격하는 가장 끔찍한 종말을 목격할 수 있으니 말이다. ‘28일후’라는 영화에서도 분노 바이러스라는 세균에 미친 사람들이 서로를 죽이는 가운데 인류는 종말을 맞이한다.
게다가 밀폐된 지하로 쫓겨나는 ‘12 몽키즈’나, 세균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상황에서도 권력 다툼을 벌이는 ‘에덴’에 이르기까지 생물 병기로 인한 멸망은 핵병기처럼 깔끔할 것 같지는 않다.(아니 ‘북두의 권’을 보면 핵병기에서 살아남은 후의 생활이 더 불행해 보이기도 한다.)
보다 현실적인 문제로 환경 재앙은 어떨까? 지금에야 옷 좀 두껍게 입으면 충분하지만, ‘투모로우’처럼 빙하기가 닥쳐 그 겨울이 수 백 년, 아니 어쩌면 수 천 년 이상 계속된다면 내복 한 두 벌로 버티기는 너무 괴로울 것이다. 추운 게 싫다면 ‘청의 6호’나 ‘워터월드’처럼 바다로 가득한 세계는 어떨까?
당장은 해수욕장이 늘어나 좋아할지 몰라도 역시 인어가 아닌 이상 그렇게 살아가는게 행복할 것 같지는 않다. 게다가 어느 쪽이건 우리네 인류의 문화는 붕괴되고, 멸망의 시기는 아주 오래 오래, 고통스럽게 지속될 것이다.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한 ‘SF’ 하지만 그 안에는 이처럼 불길한 예견도 함께 담겨 있다. 그리고 우리가 이들을 무시한다면 언젠가 그 옛날 번영하던 카르타고, 그리고 로마가 처참한 종말을 맞이했듯이 진정으로 쓸쓸하고 슬픈 결말이 찾아올지도 모른다.SF 칼럼리스트. 게임아카데미에서 SF 소재론을 강의 중이며, 띵 소프트에서 스토리 기획자로 일하고 있다.
스페이스 판타지(http:www.joysf.com)란 팬 페이지로 유명하다.
<전홍식기자 pyodogi@sfwa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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