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인은 어떻게 돈을 벌까? 제 아무리 무공의 고수라도 먹어야 산다. 먹을 걸 사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 무림인도 결국은 생활을 위해 직업을 가져야 하는 것 아닐까?
직업이 필요없는 경우도 있다. 물려받은 재산이 많으면 평생 놀고 먹는 인생으로 살 수도 있으니까. 사실 무술의 고수란 부잣집 자식이 아니면 가능하지 않다는 이론도 있다.
사부를 초빙하는 사례금을 대기위해서도 그렇고, 무엇보다 평생 무술 수련만 하며 살기 위해서는 따로 직업을 가질 필요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낮에 일하고 밤에 공부해서 성공한다는 입지전적 이야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힘든 육체적 고행을 수반하는 무공수련과 직업을 병행하기란 아무래도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부자라서 직업을 안 가져도 되는 무림방회가 있다.
남궁세가니 사천당문이니 하는 강호세가(江湖世家)가 그것이다. 세가란 대대로 내려오는 명문대가를 의미한다. 주로 강남지역에 많이 분포하는데, 이 지역은 강북에 비해 전란을 많이 겪지 않았고, 그래서 대대로 부와 권력을 유지하는 토호들이 많았다.
이런 토호들 중 무공으로 유명한 곳을 세가라고 한다. 많은 땅을 가져서 소작농을 부린다. 지역의 상권에도 관여하고 있다. 당연히 일할 필요가 없다.명문정파도 돈을 벌기 위해 다른 일을 안 해도 되는 집단이다. 소림사는 절이다. 무당파는 도관이다. 화산파도 도관, 아미파는 절이다. 신도들이 찾아와 향을 바친다. 향만 바치는 게 아니라 복과 운을 빌기 위해서 시주도 하고 간다. 이런 신도들을 향객(香客)이라 부르는데 명문정파의 주 수입원이 바로 이들 향객의 시주돈이다.
명문정파쯤 되면 강호세가 못지않게 땅도 많다. 소림사나 무당파쯤 되는 종교단체에게는 황제가 전답을 하사해서 거기서 나오는 소출을 갖도록 하는 게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대규모의 소작농을 거느린 지주가 되는 것이다.
흑도방파는 어떨까? 흑도방파는 현대식으로 말하면 조직폭력배에 가깝다. 이들의 주된 업무는 협박과 폭력이다. 그러니 흑도방파가 사는 법은 생계를 위한 일과 무공수련이 일치하는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즉, 이발사가 이발기술을 수련하는 것처럼 강도는 무공을 수련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런 식으로 무림의 방회는 생계를 위해 따로 직업을 가질 필요가 없다. 달리 말하면 소림사의 승려는 화상이라는 신분 자체가 직업이다. 무당파의 도사, 개방의 거지, 녹림맹의 도적도 마찬가지다. 다수의 소작농을 부리는 지주도 직업으로 볼 수 있다면 무림세가란 즉 지주들의 집단이다.그러나 명문정파의 속가제자라거나 아무 방파에도 속하지 않은 무림인들도 있다. 이들은 생계를 위해 직업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무림인들의 직업을 말할 수 있게 된다.
무림인들이 가장 쉽게 가질 수 있는 직업은 호위무사, 즉 경호원이다. 무협 용어로는 보표, 혹은 호원(護園)이라 한다. 보표는 특정인을 호위하는 보디가드, 호원은 특정가문을 보호하는 경호대라는 느낌이 강하다. 한국의 초우라는 작가가 쓴 ‘호위무사’라는 무협소설이 제목 그대로 이런 직업을 가진 무림인을 묘사하고 있다.
이런 경호, 혹은 호위라는 일을 집단적으로 하는 곳도 있다. 바로 표국이다. 표국이란 치안이 불안한 곳을 지나가야 하는 여행자(주로 상인들이다)를 호위하여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도록 지켜주는 업체를 말한다. 때로는 특정인을 경호하기도 하고, 때로는 그들이 직접 물품을 나른다.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을 표사라고 한다.
청말의 유명한 무술인으로 왕오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의 직업이 바로 표사였다. 그는 직접 표국을 운영하기도 했고, 청말의 유명한 지사인 담사동을 호위하는 일도 했었다. 큰 칼을 주무기로 쓴다고 해서 그를 대도 왕오라고 불렀는데, 그를 주인공으로 해서 대도 왕오라는 영화도 만들어진 바 있다. 실존했던 중국의 대표적인 표사인 것이다.
표사들 속에도 위계와 직무에 따라 부르는 명칭이 따로 있다. 가장 하급표사를 쟁자수(爭子手)라 부른다. 이들은 짐수레를 끌고, 말을 몬다. 마을을 지나갈 때에는 내내 고함을 질러 표차, 즉 표국이 운송하는 짐이 지나간다는 신호를 해야 한다. 표사라기보다는 일꾼에 가까운 역할이다.
표사는 허리에 칼을 차고 한 손은 칼 손잡이에, 다른 한 손은 짐수레에 대고 표차가 움직이는 동안 그 자세를 유지하며 걸어야 한다. 그리고 싸움이 나면 전면에 나서서 목숨을 바쳐서라도 표차를 지키는 것이 임무다.
표사들의 우두머리를 표두라고 한다. 여러 명의 표두를 거느린 사람은 대표두라고 부른다. 이런 표사들의 세계를 그린 무협소설도 있다. 필자가 쓴 ‘독행표’, ‘금전표’가 그렇고 황규영의 ‘표사’도 그렇다.
무공실력이 조건이 되고 기술이 되는 직업으로 포두(捕頭)도 꼽을 수 있겠다.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포졸, 혹은 포도대장류의 직업을 말하는 것이다. 즉, 오늘날의 경찰, 형사다. 우리나라에서는 무협에 관부의 개입을 달갑지 않게 여겨서 아예 빼놓는 경우가 많지만 엄연히 그들도 무림인이다. 아예 직업적인 포두도 있지만 때로는 관부의 필요에 의해 무림고수가 스카우트 된 경우도 있다고 한다.
청나라 초기에 무당파의 고수 하나가 청나라 조정에 포섭되어 반청복명을 주장하는 무림인들을 잡아 죽이고 다녔다는 이야기는 사실은 아니겠지만 중국 민간에는 널리 퍼진 전설이다. 이 이야기를 소재로 해서 소설도 많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 무당파 고수도 말하자면 일종의 스카우트된 포두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이런 포두를 주인공으로 해서 온서안은 ‘사대명포’를 썼고, 사마령은 ‘명포심신통전기’를 썼다. 주인공은 아니지만 자주 조연으로 등장시킨 작가가 고룡이다. 그는 ‘환락영웅’에서 악명 높은 포두 장곤(長棍)을 등장시키는데, 장곤이란 본명이 아니라 별명으로 ‘몽둥이’라는 뜻이다. 범인을 잡을 때 몽둥이로 가혹하게 폭행한다 해서 붙은 별명이다.
필자 역시 포두를 중요 조연으로 등장시킨 일이 있다. 졸저 ‘금강불괴’에는 무림에서 가장 강한 십대고수 중 하나로 맹방평이라는 인물이 나와서 무림의 악인들을 국법에 의거해 잡아들이거나 처단하는 일을 한다.
무공이 필수적인 직업 중 하나로 자객도 있다. 킬러, 청부살인업자를 직업이라 부를 수 있다면 말이다. 고룡이 자객을 주인공으로 한 ‘유성호접검’을 썼다. 국내작가 중에서도 서효원이 자객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여럿 썼는데 그의 대표작인 ‘대자객교’가 바로 그중 하나다. 검궁인의 ‘자객도’는 자객을 다룬 작품들 중에서도 수작이라 할만 하다.도둑도 직업이라 할 수 있을까? 고룡의 대표작 중 하나인 ‘초류향’은 직업적인 도둑이다. 국내에서도 사마달은 ‘유향도수’라고 해서 도둑을 주인공으로 삼은 작품을 썼다.
떼강도질을 직업으로 삼은 무협 주인공도 있다. 중국작가 운중악의 ‘용사팔황 2부’는 원제가 ‘사해보응신’인데 여기에는 네 명으로 구성된 떼강도가 주인공이다. 원래 사는 곳에서는 수레를 만들고, 고치고, 빌려주는 차행(車行)이라는 직업을 가지고 번 듯이 살고 있지만 때가 되면 다른 고장으로 가서(사는 곳에서 강도질을 하면 위험하니까)
강도질을 한 뒤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물론 무협주인공 답게 의적을 자처하지만 강도는 강도다.
이 외에도 점쟁이, 어부, 나무꾼, 요리사, 글 선생(일종의 가정교사), 상인 등 무림인이 아니어도 상관없는 직업들을 가진 무협 주인공도 많지만 그건 말 그대로 무림인이 아니어도 되는 직업이기 때문에 생략한다.무협작가로 ‘대도오’, ‘생사박’, ‘혈기린외전’ 등의 작품이 있다. 무협게임 ‘구룡쟁패’의 시나리오를 쓰고 이를 제작하는 인디21의 콘텐츠 담당 이사로 재직 중이다.
[사진설명 : 사진 순서대로..]
◇ 낭만자객 포스터. 이것도 일종의 자객무협이라고 할 수 있을까?
◇ 황규영의 표사.
◇ 백우의 강호제일숙수. 숙수, 즉 요리사가 주인공이다.
◇ 이연걸의 보디가드. 포스터를 자세히 보면 원제가 중남해 ‘보표’인 것을 알 수 있다. 보표=보디가드인 것이다.
◇ 도관의 제단. 여기에 돈을 바치거나 향을 피운다.
◇ 졸저 금강불괴.
◇ 중국의 향은 한국 것보다 크고, 한 묶음씩 태우게 되어있다. 대개 절이나 도관에서 산다. 물론 그것도 절과 도관의 수입이다.
<좌백(佐栢) jwabk@freech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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