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식회사 디지털 대한민국](6)조국근대화의 기수-수출 드라이브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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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공부 장관은 전자기기 등의 수출을 촉진하기 위하여 필요한 때에는 전자공업단지를 조성할 수 있다.”(전자공업진흥법 11조 1항) 5.16으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 대통령은 국산화와 가전산업의 수출 드라이브 정책을 전면으로 내세웠다. 구미전자공업단지가 조성되고, 국산화가 당면 지상과제로 부상한다. 이 시기 외제와 국산을 구분하는 특이한 양분법도 정착된다. 우리나라는 64년 마련된 ‘수출산업공업단지개발 조성법’에 따라 70년대 들어서면서 정부직할공업단지·수출자유지역·지방공업단지·민간공업단지 등 세분화되며 전자산업대국의 꿈을 키우닌 시기였다.

 1973년 ‘산업기지 개발촉진법’이 제정되면서 전국은 공단 조성에 매진한다. 직할 공단으로는 수도권 영등포·구로·시흥·부천·부평·주안 등에 한국수출산업 1∼6공단이 지방에는 온산공단, 창원공단, 반원공단, 구미공단 등이 속속 조성됐다. 직할공단은 기계·종합화학·전자 산업 중심으로 육성됐고, 마산 등지에는 수출자유지역이 형성됐다. 지방에는 광주·대구·전주·춘천 등이 생겨났다.

 ◇구미공단과 마산수출자유지역=전자산업 메카로 자리잡은 구미와 마산은 1960년대말 조성되기 시작했다. 1969년 1월 전자공업진흥법이 제정되고 그에 따른 실천 목표로 제시된 전자공업진흥 8개년 계획과 맞물려 추진됐다. 구미공단은 경북 선산군 구미읍 낙동강 일대 120만평 위에 세워졌다. 당시 계획에 따르면 구미공단은 1단지 전자·섬유, 2단지 반도체 중심으로 기획됐다. 1단지 조성은 1974년 마무리 됐고 대부분 노동집약 성격이 강한 조립중심 업종으로 구성됐다. 1980년 2단지가 완공될 때 입주업체는 전자분야 97개업체, 섬유분야 91개사, 기타 17개사 등 도합 205개사에 이르렀다. 이 같은 공단 조성이 성공을 거두자 정부는 칠곡군 등 부지 250만평을 추가로 매입, 3단지를 조성한다. 구미 공단은 전자기기 국산화와 수출을 목표로 세워진 정책공단 성격을 띄었다. 당시 상공부의 전자기기 수출목표는 1971년 1억달러, 1976년 4억달러였다.

 마산 수출 자유지역의 목표 역시 분명했다. 수출신장·외자유치·고용증대·기술향상이었다. 마산 수출 자유지역 건설은 1968년 마산 상공인들이 모여 수출자유지역 설립 추진대회를 열며 본격화됐다. 정부는 이를 계기로 1969년 9월 수출자유지역설치법 제정과 함께 마산시 봉암동, 양덕동 일대 25만평을 수출자유지역으로 지정했다. 이 곳은 70년 5월에 착공돼 73년 완공됐다. 당시 정부 계획은 국내에서 조달 가능한 부품과 원자재를 가능한 국내에서 조달, 이를 조립해 수출하는 것이 목표였다. 마산 수출자유지역은 외자유치에도 탁월한 성과를 거뒀다. 1980년까지 일본기업 69개사, 한미·합작기업 4개사 등 99개 다국적기업이 입주했기 때문이다. 주요 입주 업체 70%이상이 전자와 소재분야 업체였던 마산수출자유지역은 70년대 전자산업의 메카이자 조국근대화의 기수였다.

 ◇수출만이 살길이다=국산화를 목표로 했던 전자업체는 70년대 들어서면서 해외 수출에 눈을 돌렸다. 50년대 후반 해외시찰단 등을 통해 외국 현실을 접한 기업들은 70년대 들어 수출관련단체 결성, 해외 박람회 참가, 해외 영업담당자 파견 등 다양한 해외마케팅에 나선다. 가장 두드러진 활동은 수출조합 결성이다.

 업계는 70년 8월 서울 뉴코리아호텔에 모여 한국전자제품 수출조합 창립총회를 열고 “수출전략을 일원화해 수출시장을 다변화하는 한편 수출품목을 확대하자”는 목표를 세운다. 초대 이사장에는 구미공단 설립에 공을 세운 곽태석 싸니전기 사장이, 이사진으로는 허준구 금성사 사장, 설경동 대한전선 사장, 김재명 삼성산요전기 사장, 오동선 삼화콘덴서 사장 등이 선임됐다. 수출조합 발족으로 인해 한국전자공업협동조합과 한국정밀기기센터가 담당했던 국산 전자제품 수출 업무가 단일화되면서 본격적인 해외 시장 개척에 나서게 됐다.

 박정희 정권은 이와 비슷한 73년에 중화학 공업 육성계획을 수립, 시행하게 된다. 박정희 정권은 73년 3월 경제기획원 장관을 위원장으로 하는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를 설치해 중화학공업 육성에 나선다. 중화학공업 육성은 71년 7월 제7대 대통령 취임사에서 이미 가시화됐다. 박대통령은 “나는 앞으로 중화학공업시대의 막을 올리고 한강변의 기적을 4대강에 재현 시킬 것이며, 수출입국의 물결을 5대양에 일으키며 농어촌을 근대화하여 우리나라를 곧 중진국의 상위국에 올려놓고야 말것입니다”라며 중화학공업 육성의지를 밝혔다. 이후 정부는 다양한 중화학공업육성정책을 수립, 시행한다. 당시 경제팀은 태완선 경제기획원 장관, 남덕우 재무무장관, 이낙선 상공부 장관, 신상철 체신부 장관, 최형섭 과기처 장관, 정소영 청와대 제1경제수석 등이었다.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은 73년 10월 오일쇼크로 타격을 받는다. 상황이 긴박해지자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와 경제기획원이 중화학공업 육성계획을 전면 수정하자고 청와대에 요청한다. 그러나 박대통령은 단호했다. ‘부분적 조정은 있지만, 전반적인 기본계획은 수정하지 않겠다’며 비교 우위 업종으로 지목된 전자업종을 중심으로 부품과 소재 국산회에 집중투자할 것을 지시한다.

 ◇삼성의 등장=69년 출범함 삼성은 70년대 들어서면서 선발주자인 금성과 본격적인 경쟁시대를 맞는다. 금성이 70년대 초반 품목다양화에 나섰다면, 삼성은 TV·냉장고 등 일부 품목에 주력하는 생산체제를 구축했다. 이 과정에서 삼성은 브라운관, 실리콘트랜지스터, 튜너, 고압트랜스 등 부품과 브라운관 유리벌브 등 기술력을 축적하게 된다. 이른바 ‘부품에서 완제품까지’라는 삼성 특유의 수직계열화 전통이 수립되는 시기다. 삼성은 74년까지 수직계열화에 나서 삼성전자공업·삼성산요전기·삼성NEC·삼성일렉트로닉스·삼성산요파츠·삼성코닝 6개사를 설립한다. 이후 삼성 관련 계열사들은 일본 합작회사와의 분리, 부분별 통합, 흡수합병 등을 통해 오늘날 삼성전자의 골격을 갖췄다.

 

◆대한민국, 구미공단

 구미는 박정희 대통령의 고향이다. 대통령 박정희는 자신의 고향에 대규모 전자산업공단이 조성되는 것을 부담스러워했다. 박정희는 구미공단에 공업단지가 들어섰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었으나, 박대통령은 정치적 부담을 느껴 사석에서 반대 입장을 밝혔던 것으로 전해진다. 박대통령은 구미공단은 수도권에 이어 울산, 춘천, 청주 등 지방도시에 공단이 들어선 이후 만들어졌다.

 정작 구미공단 조성에 앞장선 인물은 당시 경북도지사였던 양택식, 구미 유지였던 장월상과 재일교포 실업가 곽태석, 기업인 이원만, 서갑호 등이었다. 특히 장월상은 박정희 대통령과 유년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양택식 경북도지사가 도내 월성군 안강면에 공업단지를 유치하려 하자. 장월상은 구미 선산군수 박창규를 포함한 지역 유지 50명을 규합, 유치전에 나섰다. 경북도지사는 결국 공단 부지 120만평을 평당 220원에 매입한다는 조건을 달고 안강면 유치계획을 구미지역으로 바꾸게 된 것이 구미공단의 시작이다. 한국도시바 사장이었던 곽태석은 구미 공단 조성에 앞서 1969년 구미공단에 반도체 공장을 착공, 유치작전을 지원했다. 구미공단이 전자전문공단으로 결정된 것은 1970년 8월 제8차 수출진흥 확대회의에서였다. 공단은 다시 74년 구미수출산업공단으로 개편, 대한민국 대표 전자산업 중심지역으로 자리잡게 된다.

 김상룡기자@전자신문, srkim@

◆사진 한장으로 보는 전자산업-국내 최초 VCR

 삼성전자 이병철 선대회장은 새로운 영상매체로 등장한 VCR 개발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반도체·PC와 함께 VCR를 전략 품목으로 육성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VCR 개발의 첫번째 방법은 선진 기술을 보유한 일본업체와의 제휴였다. 그러나 일본기업들은 VCR 기술만큼은 절대 외국에 전수하지 않는다는 방침 아래 철저히 기밀을 유지했을 뿐 아니라 부품 공급도 금지하고 있었다.

몇개월의 교섭 끝에 일본으로부터의 기술 도입이 힘들다고 판단한 삼성전자는 결국 자체 개발로 방향을 전환했다. 당시 국내 기술로는 VCR의 개발이 불가능하다고 인식되던 시절이었다. VCR는 3200여개의 부품이 들어가고 정밀성과 고도의 녹화기술이 필요한 첨단 전자제품의 결정체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1978년 6월, 5명의 삼성전자 개발 요원이 일본 빅터(JVC)의 신제품을 분해·조립해 보며 VCR의 개발에 착수했다. 이듬해 5월 60억원의 개발비를 투입한 끝에 국내 최초의 VCR 개발에 성공했다. 일본·서독·네덜란드에 이은 세계 4번째 개발이었다. 최초 제품 SV-7700은 VHS 방식을 채택했으며 기능부와 튜너부는 모두 기계식이고 톱 로딩 방식이었다.

삼성전자의 VCR 개발은 우리나라 전자기술 및 정밀기계 가공기술을 한단계 발전시키는 촉진제가 됐으며 우리나라 전자산업을 기능 경쟁에서 기술 경쟁 중심으로 바꾼 계기가 됐다. 삼성전자는 이후 81년부터 윤종용 현 부회장에게 VCR사업부를 맡겨 사업화에 성공을 거둔다. 윤종용 부회장은 5년 동안 사업부장으로 재직하면서 VCR 개발에 매진한다. 개발과정에서 이병철 선대회장에게 불려가 혼이 나기도 했으며, 스트레스 때문에 원형탈모증이 걸렸다는 후문이 들린다. 이건희 당시 부회장도 윤종용 사업부장을 불러 VCR의 문제점을 일일히 지적하며 “지금 당장 VCR 생산을 중단하고, 품질을 안정화한 후 재생산하라”는 지시를 받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