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재봉의 영화사냥]에로스

옴니버스 영화 ‘에로스’는 왕가위, 스티븐 소더버그,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등 영화사에 남을 세계 거장 감독들의 에로틱한 영화들을 한 군데서 볼 수 있다는 매력이 있다.

‘열혈남아’ ‘아비정전’ ‘중경삼림’으로 국내 시네 마니아들에게는 설명이 필요 없는 왕가위 감독의 ‘그녀의 손길’, 그리고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 테이프’로 재기발랄하게 데뷔해서 칸느 황금종려상을 받은 이후 할리우드 상업영화 ‘트래픽’ ‘오션스 일레븐’까지 폭넓은 족적을 보여준 스티븐 소더버그의 ‘꿈속의 여인’, 영화사에 남는 고전 걸작 ‘욕망’이나 ‘정사’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노감독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위험한 관계’, 3편 모두 뛰어나다.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프로듀서가 먼저 이 영화의 아이디어를 냈고 다른 두 감독은 거장에 대한 존경심으로 기꺼이 이 작업에 동참했다. 홍콩과 미국, 이탈리아. 전혀 다른 문화권 속에서 살아가는 감독들이고 그들이 만든 이야기지만, 인간의 욕망을 로맨틱하게 풀어내는 방법론 속에서 인간 본질의 공통점을 찾아볼 수 있다.

매일 밤 똑같은 꿈을 꾸는 한 남자가 정신과 상담을 하는 과정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꿈속의 여인’은 전형적인 단편 스타일이다. 매일 꿈속에 등장하는 그녀는 누구일까? 스티븐 소더버그의 이 단편에는 위트와 유머가 있다.

그러나 너무 단순하다. 정신과 침대에 누워 상담을 하는 동안 정신과 의사는 환자의 말에는 열심히 귀 기울이는 것 같지도 않다. 그는 쌍안경으로 길 건너편을 계속해서 살핀다. 마지막 결말은 단편이 갖는 산뜻한 위트와 유머가 있다.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감독의 ‘위험한 관계’는 노장 감독의 원숙한 지혜를 엿보게 한다. 질풍노도의 삶을 거쳐 인생의 마지막 절벽에 이른 노감독은, 인생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권태기에 이른 두 부부가 여행지에서 티격태격 싸운다. 그리고 한 여자가 나타난다. 삶의 희노애락을 다 겪은 노 감독이지만, 에로스에 대한 뜨거운 갈망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3편 중에서 한 편을 고른다면, 왕가위의 ‘그녀의 손길’을 제일 먼저 추천하고 싶다. 고급 창녀와 재단사 사이의 오랜 기간 감정의 교류를 보여주는 이 영화는, ‘화양연화’ 이후 터질 듯한 긴장감으로 남녀의 감정을 끈끈하면서 섬세하게 포착하는 데 탁월한 솜씨를 보여준 왕가위 감독이 자신의 절정의 기량을 보여준 작품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내러티브가 아니다. 그들이 어떻게 만났고 왜 헤어졌는가 이런 것보다 더 우리를 사로잡는 것은 그 정서를 전달하는 방식이다.

창녀의 방, 재단사의 작업실, 그리고 호텔의 비좁은 복도 등 왕가위 영화에 등장하는 공간은 단순히 인물이 위치해 있는 지점 이상의 의미를 띄고 있다. 공간 그 자체가 살아서 말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 공간들은 인물들의 정서를 그들의 발언보다 더 정확하게 관객들에게 전달한다.

남녀 사이의 갈등이 충돌했다 풀어지는 과정을 통해 욕망의 본질에 접근하는 왕가위의 시선은 매혹적이다. ‘그녀의 손길’에서 젊은 재단사와 고급 창녀 사이의 욕망의 시선을, 그 변화과정을, 커트 사이의 풍부한 여백과 울림으로 전달하고 있다. 그 미장센은 숨 막힐 듯 아름답다. 턱까지 차오른 숨을 더 이상 쉴 수 없을 것 같은 그 아름다움, 질식할 것 같은 긴장감을 형성하며 형성되는 그 아름다움에 동참하시라.

<영화 평론가·인하대 겸임교수 s2jazz@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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