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보, 너마저.’
우리나라 첫 벤처에서 국민기업으로 각광받던 삼보컴퓨터가 마침내 법정관리를 신청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문득 시저가 가장 믿었던 브루투스의 칼에 쓰러지면서 남긴 말이 떠오른다. 지난 99년 매출 조(兆) 시대를 열면서 이제 외풍이 아니면 넘어지지 않는 기반을 구축했다며 환호성을 내지른 지 5년도 안 돼 삼보가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질 것이라고는 누구도 생각지 못했다.
삼보는 지난 4반세기 동안 불모지였던 한국의 PC산업을 일궈 온 일등공신이다. 삼성전자나 LG전자 등 어느 기업도 삼보의 아성을 무너뜨리지 못했다. 전문기업의 최대 강점인 민첩성을 앞세워 제품을 한 발 먼저 내놓음으로써 삼보는 삼성과 LG전자뿐 아니라 IBM이나 HP와 같은 다국적 기업들이 한국 시장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했다. 국내 PC 시장이 다국적 기업들에 유린당하지 않았던 배경이다.
더구나 삼보는 20여년 전부터 수많은 벤처를 탄생케 한 진원지다. 삼보의 자금이 밀알이 돼 IT 전 분야에서 수많은 벤처성공 신화가 쓰여졌다. 혹자는 단순히 삼보의 ‘머니게임’이라고 폄하하지만 삼보의 자금으로 인해 우리나라 벤처산업과 문화가 꽃을 피웠음을 누구도 부인키 어렵다. 삼보가 IT가 아닌 비IT인에게도 국민기업으로 인식되고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삼보의 몰락이 더욱 가슴 아픈 것은 우리나라 IT산업을 이끌어 왔던 전문기업 시대가 마침내 끝나는 것 아닌가 하는 안타까움 때문이다. 인켈이나 맥슨 등 한 시절을 풍미했던 전문기업들이 사라진 상황에서 삼보만이 IT 전문기업의 명맥을 이어 왔다.
전문기업과 대기업들과의 경쟁은 전문성에 따라 결정된다. 대기업들이야 한 사업에서 적자가 나더라도 다른 사업에서 수익을 올릴 수 있지만 전문기업의 입장에서는 상황이 악화되면 곧바로 직접적인 타격을 받게 된다. PC 시장도 마찬가지다. 이미 PC산업은 전문영역이 아닌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시장이 됐다. 기술이 아닌 자금을 앞세운 생산력과 마케팅력으로 결정된다는 이야기다. 지난 94년, 삼보가 국내 PC 시장에서 부동의 1위 자리를 삼성전자에 넘겨주었던 것도 PC가 일반가전제품이 된 시점과 맥을 같이한다.
여기에 시장 개방으로 다국적 기업들의 공세가 거세지고 가격을 앞세운 중국의 부상으로 전문기업으로서 삼보가 지탱하기 어려운 상황이 돼버렸다. 당연히 삼보도 덩치를 키우려 노력했고 이것이 삼보의 최대 강점인 민첩성을 무뎌지게 하면서 오히려 삼보를 위협하는 악순환의 고리가 만들어졌다. 컴마을, 현주컴퓨터 등에 이어 마지막 보루로 여겼던 삼보마저 이 같은 시장의 거대한 흐름 속에 휩쓸려 버리게 된 것이다.
삼보는 과거의 화려함을 잊고 이제 가시밭길을 걸어야 한다. 창업보다 더 어려운 길이다. 그러나 반드시 이 고비를 넘기고 재기해야 한다. 삼보가 이대로 무너진다면 다시는 삼보와 같은 대형 전문기업의 출현은 기대하기 어렵다. 정부의 숱한 중소기업 육성책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기업은 대기업과 이들 대기업에 납품하며 살아가는 협력업체들에 불과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나쁜 선례를 남기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당장 법정관리가 받아들여져도 삼보는 수출이 아닌 내수에서 회생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또 PC생산에 필요한 각종 부품은 협력업체 지원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따라서 삼보의 회생은 남아있는 직원들의 임무만은 아니다. 우리 경제가 오로지 대기업에만 의존해야 하는가. ‘아니다’라는 답을 삼보에서 찾으려면, 정부나 국민을 포함한 모든 경제 주체가 삼보가 회생하는 데 든든한 버팀목이 돼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양승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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