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백의 武林紀行](1)

영화 ‘동방불패’의 원작으로 유명한 김용의 ‘소오강호’에서 김용은 이렇게 노래한다.

“강호가 어디냐고 묻지 마라. 사람 사는 곳 모두가 강호이니….” 무림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사람 사는 곳 모두가 무림이라고. 그럴지도 모르고 아닐지도 모른다. 사람 사는 곳 모두가 무림은 아니지만 이제 우린 일상적으로 무림을 접할 수 있다.

영화에서, 책에서, 게임에서도. 이번 호부터 우리나라 무협소설의 새로운 지평을 연 작가 좌백과 함께 무림의 오묘한 세계로 떠나보기로 하자. <편집자>북경의 여름은 서울보다 5도쯤 무덥다. 겨울은 서울보다 5도쯤 춥다. 봄에는 황사바람에 시달려 눈을 못 뜰 지경이고 가을은 언제 왔는지도 모르게 후딱 지나가 버린다. 매년 물이 모자라 여름에는 식수도 배급할 지경이라고 한다. 대체 이렇게 살기 괴로운 땅을 수도로 삼은 황제들의 마음을 모르겠다. 실제로는 매년 여름과 겨울 각각 삼 개월씩 황제들은 피서, 피한을 떠났다고 한다. 그나마 살기 좋을 때만 북경에 있었던 셈이다.

2001년 5월, 우리 감각으로는 봄이어야 할텐데 북경은 이미 여름날씨였다. 찌는 듯이 더운 북경의 하늘 아래에서 필자는 몇 명의 동행과 함께 북경의 옛 주택가, 이른바 노(老) 북경 거리라고 부르는 골목들을 세 시간째 걷고 있었다. 서울 못지않게 화려한 빌딩숲을 이루고 있는 중심가와는 달리 이곳 노 북경 거리는 청나라와 중화민국을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거의 변하지 않은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서민들의 주택이 밀집해 있는 곳이다.

디귿 자로 방들이 배치되어 있고 나머지 한 면은 문이 뚫려있는 벽이다. 그렇게 네모꼴로 구획된 공간의 중심에는 손바닥만한 마당이 있다. 그래도 마당 한쪽에는 바위가 있고, 꽃이 있고, 작은 나무도 있다. 하늘 또한 손바닥만하게 보이도록 가리며 튀어나온 지붕 아래에는 새가 지저귀는 새장이 걸려있다. 문을 열고 마당에 들어서는 순간 청나라의 시공간이 펼쳐지는 느낌을 받게 된다.대성권(大成拳)의 고수 왕선걸 노사(老師 : 선생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무술계의 고수들을 지칭할 때 존경을 표시하는 호칭이기도 하다)를 찾아뵙기 위해 여기를 헤매고 있다.

그해 북경에서 필자는 세 분의 고수를 만날 계획이었다. 태권도의 창시자이자 ITF(국제 태권도 연맹) 총재였던 고 최홍희 장군(만나 뵌 그 다음해에 돌아가셨다), 팔괘장(八卦掌) 4대 전인이신 이공성 노사, 그리고 왕선걸 노사였다.

최 장군은 원래 체재하고 있던 캐나다에서 북한으로 입국하려던 참이라고 했다. 그러려면 북경 공항에서 비행기를 갈아타야 하는데 중간에 한 시간쯤 빈다. 그 시간을 빌려 북한 대사관 직원이 지켜보는 앞에서 인터뷰가 이루어졌다. 물론 내가 인터뷰를 했다는 게 아니라 무술잡지 마르스의 한병철 기자가(‘고수를 찾아서’의 저자이기도 하다) 인터뷰를 하는 참에 빌붙어서 참관을 한 것이다.왕선걸 노사는 대성권을 유명하게 만든 주역으로 잘 알려져 있다. 대성권이란 ‘반보 붕권’으로 천하제일고수라 불리웠던 청말의 곽운심 노사에게서 형의권을 배운 왕향재 노사가 창시한 권법이다. 이 분은 기존의 형의권을 배우는 사람들이 형(形), 즉 형식에 구애되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 형자를 떼고 의권이라고 자신의 무술을 불렀다.

대성권이라는 이름은 다른 사람들이 존경의 의미로 붙여준 것인데 나중에는 본인도 대성권이라는 이름을 인정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왕향재 노사에게서 대성권을 배운 분이 왕선걸 노사였다.

일설에 의하면 왕향재 노사가 노쇠하게 되자 타문파의 도전자들을 직접 상대할 수 없어서 대신 싸워줄 제자가 필요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평생 배출한 수많은 제자들 중 사정이 되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 발견한 인재가 왕선걸로 무술, 특히 실전에 천재적인 감각을 가져서 싸움에 지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전투용 제자인 셈이었다. 이런 성격이 그의 말년을 비참하게 만든 것 같다. 우리가 찾아갔을 때 왕선걸 노사는 이미 타계한 후였다.

왕선걸 노사의 사인은 문화대혁명 기간 중에 홍위병들에게 끌려가 고문을 당하면서 심장을 다친 것이 원인이라고 한다. 그게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재발해서 결국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다른 이야기도 들었다. 버클이 달린 혁대와 천으로 만든 중국 전통 허리끈이 관련된 이야기다.

중국의 새벽은 공원에서 태극권을 수련하는 사람들로부터 시작된다. 노인부터 젊은이에 이르기까지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드넓은 공원에서 각자 수련을 한다. 태극권을 하는 사람도 많지만 춤을 추는 사람들도 많다. 그리고 태극권 외의 무술을 수련하는 사람들도 많다. 심지어 도와 검, 창까지 들고 나와 연무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 혹은 배우고, 또 혹은 그 자리에서 가르쳐 준다. 공원은 전통무술의 전수가 이루어지는 무대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 사람들 중에 왕선걸 노사도 있었다고 한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이고 각종 무술이 한 장소에서 시연된다. 그러니 다툼과 시비가 안 벌어지는 게 이상한 일이다. 왕선걸 노사가 한 무술인에게 주먹으로 자신을 때려보라고 했다.

얼굴을 제외한 어디를 때려도 좋다고 했단다. 중국무술의 한 특징으로 잘 알려진 기공을 보여주려고 했던 것 같다. 방어도 않고 서 있는 사람의 가슴이나 배를 주먹으로 때렸더니 때린 사람이 오히려 튕겨 나가더라 하는 이야기는 중국무술사에 널리고 널린 이야기다.그런데 이번에는 상대가 좀 안 좋았던 모양이었다. 자세를 잡는데 고수의 풍모가 보였던 것이다. 주먹이 다가오자 왕선걸 노사는 고수 체면에 걸맞지 않게, 호언장담이 무색하게도 그만 몸을 약간 비틀어 버렸다. 그 바람에 상대의 주먹은 왕선걸 노사가 차고있던 버클을 옆으로 때려 찢어지고 말았다. 피를 본 것이다.

살기등등해진 상대가 야유를 퍼부었을 것은 당연했다. 왕선걸 노사는 다시 한 번 주먹을 받아야 했다. 기공으로 신체를 보호하는 원리는 한 모금 호흡으로 기를 끌어 올린 뒤 숨을 참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내뱉거나 들이마시는 순간에 가격하면 기공이고 뭐고 쓸모가 없다. 상대는 그걸 노렸다.

한 방을 뻗었지만 허초였다. 닿기도 전에 되돌린 것이다. 그리고 왕선걸 노사가 끝난줄 알고 참았던 숨을 내쉬는 순간 진짜 일격이 들어갔다. 그 사건으로 왕선걸 노사는 평생 기침을 하며 살아야 했다고 한다. 생의 후반부에 노사를 모셨던 제자의 말에 의하면 가끔 피를 토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때 이후로 노사는 천으로 된 전통 허리끈만을 사용했다고 한다. 타인을 무시하는 게 아니며, 원한을 만들어서는 더욱 안 된다는 교훈을 내릴 때 그 허리끈을 보여주었다고 한다.세 번째로 찾아뵌 고수는 팔괘장 4대 전인 이공성 노사였다. 이분은 다행히도 건강하게 생존해 계셨다. 예순이 넘었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이제까지 만났던 어떤 사람보다도 건강했고, 고수였다. 게다가 온화하고 덕망이 높은 분이었다.

팔괘장을 수련하면 오래 산다는 말이 있다. 실제로 북경 팔괘장 문파 묘지에 가면 창시자인 동해천 선사로부터 후대의 전인들이 모두 묻혀 있는데 그중 가장 일찍 돌아가신 분이 73세라고 한다. 그래서 이분은 ‘73세로 요절하셨어’ 하는 말이 우스갯소리로 나돌기도 한다.

나머지 분들이 대부분 90세를 훌쩍 넘겨서야 돌아가셨으니 그런 말이 나올 법도 하다. 팔괘장이 격렬한 움직임보다는 내공수련을 위주로 하는 내가공부라는 게 장수의 한 원인, 무공 수련과 더불어 인격과 덕망도 같이 닦도록 하는 게 문파의 이념이라는 게 두 번째 원인이 아닌가 한다.

나는 사실 우연한 기회에 인연이 닿아 이분 이공성 노사의 전인인 설인호 노사에게서 이년 간 팔괘장을 배웠다. 배사(拜師 : 스승으로 모시는 의식)를 하지 않아 한 문파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런 인연도 인연으로 인정했는지 노사께서 직접 저술한 책에 휘호를 쓰고 문파의 직인을 찍어 선사하는 영광을 입을 수 있었다.

직접 창안하신 수련법도 한 가지 전수받았다. 북경의 하늘 아래에서 팔괘문의 전수자에게서 직접 한 초식을 가르침 받은 것이다. 순간적으로 그 자리에서 무림이 재현된 듯한 착각을 느꼈다.무협작가로 ‘대도오’, ‘생사박’, ‘혈기린외전’ 등의 작품이 있다. 무협게임 ‘구룡쟁패’의 시나리오를 쓰고 이를 제작하는 인디21의 컨텐츠 담당 이사로 재직 중이다.

[사진설명 : 사진 순서대로..]

◇ 이공성 노사의 팔쾌장 중 액장 자세.

◇ 북경 공항에서 만난 최홍희 총재. 85세인데도 정정했지만 다음 해인 2002년 6월 15일 북한 땅에서 영면했다.

◇ 왕선걸 노사의 영정. 생전에 소유했던 것은 지금 사진 속 책상 위에 있는 것이 전부였다고 한다.

◇ 공원에서 수련하는 중국인들.

◇ 이연걸, 임청하가 주연한 동방불패.

◇ 이공성 노사의 팔괘장 연무.

◇ 자모원앙월을 든 모습

◇ <팔괘대도> 북경의 이화원을 배경으로 촬영한 이공성 노사

<좌백(左栢) jwabk@freech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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