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CEO,그들은 누구인가

스타급 최고경영자(CEO)들이 실적 부진으로 줄줄이 퇴진하고 있다. HP의 칼리 피오리나를 비롯해 소니의 이데이 노부유키, 월트 디즈니의 마이클 아이즈너 등 IT 분야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명망가들이 하나둘씩 무대 뒤편으로 사라지고 있다.

 이들은 그래도 나은 편이다. 범죄자로 전락한 CEO들도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월드컴(현 MCI) 창업주인 버너드 에버스다. 그는 회사 회계장부를 조작했다는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비단 IT업계 CEO뿐만이 아니다. 보잉의 해리 스톤사이퍼, 보험업계 대부라는 AIG의 모리스 그린버그 등이 여직원과의 추문, 회계 부정 등 불미스런 일로 물러났다.

 스타급 CEO들의 잇단 퇴진을 보면서 CEO라는 자리의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더구나 자신의 명예를 걸고 추진했던 M&A나 신경영전략이 순식간에 ‘양날의 칼’로 변해 자신을 공격하는 빌미가 됐다는 점에서 세상살이의 역설을 실감한다.

 한때 ‘IT업계 여제’로 불렸던 HP의 피오리나는 재임 기간 외부 영입 인사라는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컴팩과의 합병 등을 통해 강단 있는 경영인상을 미국인의 뇌리에 각인시키며 헤로인으로 떠올랐다. 지금 와서는 컴팩과의 합병이 무리수 아니었느냐는 부정적인 평가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공존하고 있다. 하지만 백 보 양보해서 당시 컴팩과 합병하지 않았다면 HP의 경영 상태가 지금보다 호전됐을 것이란 보장 역시 없다. 정작 그녀가 중도 하차한 이유는 HP의 기업문화에 제대로 융화되지 못하고, 내부 구성원들의 지지를 끌어내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소니의 이데이는 또 어떤가. 그의 퇴진을 보고 있노라면 CEO에 대한 평가도 한낱 ‘시류’ 아닌가싶다. 한때 그의 경영 방침과 철학을 찬미하는 책들이 서점가를 휩쓸고, 그의 경영전략을 분석하는 게 유행이었다. ‘창조적인 아이디어로 경영의 패러다임을 바꾼 경영자’라는 게 세상의 평가였다.

 그는 비디오 게임기인 플레이스테이션 사업과 영화·음악 등 콘텐츠 사업에 의욕적으로 진출하며, 소니의 사업적인 외연을 크게 확장한 인물로 꼽힌다. 방송과 통신이 융합하는 세상에서 소프트웨어와 콘텐츠에 역량을 집중하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분명 승부수를 던져 볼 만한 가치가 있다. 누가 감히 콘텐츠와 소프트웨어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이데이 회장이 물러나자 전문가들은 소니가 자신들의 고유 영역이었던 소비자 가전 분야의 경쟁력을 등한시한 채 콘텐츠 사업에 치중함으로써 실패를 자초했다는 냉정한 평가를 내렸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뭔가 부족하다. 그의 퇴장에 대한 보다 명쾌한 해답을 누군가 내놓았으면 좋겠다.

 그럼 이제 다른 쪽을 한 번 보자. 세상 모든 이치가 그렇겠지만 불명예스럽게 퇴진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선 새롭게 조명받으며 유명세를 치르는 CEO들이 있다. 아마도 MCI의 마이클 카펠러스나 모토로라의 에드 잰더가 이 범주에 속할 것이다. 카펠러스는 HP가 컴팩을 합병할 당시 컴팩 CEO를 맡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는 최근에 부실 투성이인 MCI를 버라이존에 매각하기로 해 또 한 번 경영 수완을 발휘했다. 이 때문에 그는 퀀텀의 벨루 조 등과 함께 HP의 차기 CEO 물망에 올라 있다.

 선마이크로시스템스 임원 출신인 에드 잰더 역시 모토로라를 회생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CEO로 부임한 지 1년 정도밖에 안 된 상황에서 무슨 수를 냈는지는 몰라도 세간의 평가는 그렇다. 삼성전자에 빼앗겼던 휴대폰 2위 자리를 되찾았으니 그럴 법도 하다. 그러나 이들 CEO에 대한 우호적인 평가가 언제까지 지속될지 솔직히 의문스럽다. 어차피 이것도 시류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사실 CEO에 대한 최종적인 판단은 그가 ‘지속 가능한 기업’을 만드는 데 얼마나 공헌했는가에 달려 있다. 말은 쉽지만 누구도 실현하기 쉽지 않은 과제다. 이 때문에 요즘 기업들은 새로운 CEO를 물색하는 데 예전보다 시간이 걸리는 모양이다.

<장길수 국제기획부장 ksjang@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