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단의 순간들]정근모 과학기술한림원장(5)

(5) 대학을 깨운 우수연구센터사업

1988년에 출범한 제6공화국 정부는 기초과학과 기초연구를 진흥시키는데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이를 반영, 1989년을 기초과학원년으로 선포하는 등 구체적인 방안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당시 아주대학교 석좌교수로 부임해 에너지문제연구소를 신설하고 한국 최초의 대학원 에너지학과를 개설하고 있던 나에게 최순달 한국과학재단 이사장의 요청이 왔다.

한국과학재단 정책위원회 위원장직을 맡아 대학의 기초연구 활성화 방안 정책을 연구해 달라는 것이었다. 미국과학재단에서 오래 근무했던 나는 우리나라 대학 과학기술연구의 문제점이 연구비의 영세성과 짧은 연구기간에 있다고 판단했다. 미국과학재단의 성공적인 과학기술센터(STC) 사업과 학연협력센터 사업의 진취성을 파악한 우리 연구팀은 당시의 연구비지급 모형에서 탈피한 획기적인 대형 연구지원 사업 모형을 만들어 건의했다.

1989년 2월 최순달 박사가 KAIST 교수로 부임하면서 당시 이상희 과학기술처장관은 내게 한국과학재단 이사장직을 맡겼다. 이미 우수연구센터 사업을 추진하자고 자세한 정책연구보고서까지 준비했던 나로서는 그 보고서의 권고 사항을 실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더욱이 한국과학재단은 매년 정부로부터 받는 출연금 이외에도 독자적인 기금을 갖고 있어서 새로운 정책방안을 실천하는 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한 기관이었다.

나는 취임하자마자 대학우수연구센터 사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과학연구센터(SRC)는 기초과학 연구진흥의 핵심체로, 공학연구센터(ERC)는 산학협동연구의 핵심체로서 구상되었던 것이다. 당해연도 예산작업이 이미 끝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우수연구센터사업을 위해 정부출연금을 받아내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과학재단은 기금이 있었기에 우리는 과감하게 우수연구센터사업을 공표해 대학교수들로 하여금 사업제의서를 준비하도록 독려했다. 매년 연구비를 10억원 대까지 조달할 수 있고 무엇보다도 잘 운영하면 연구사업 기간이 9년까지 보장된다는 것은 당시 대학교수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조건이었다. 단 과학재단은 교수들 간에 협동연구를 장려하기 위해 적어도 5개교 이상의 재적교수 25명 이상 연구 사업 참여라는 조건을 내걸었다.

1989년은 우리나라 대학의 연구 분위기를 확 바꾸어 놓은 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89년 여름 우리나라 이공계 대학교수들은 방학이 없었다. 같은 분야의 우수한 교수들 간 모임을 결성하고 획기적인 연구 과제를 도출해 SRC, ERC 사업제의서를 작성해야 했다. ERC에는 기업의 참여가 필요하니 기업 방문이 이루어졌고 이는 실질적인 산학협동 통로가 개설의 계기가 되었다. 전국에서 145개의 사업제의서가 준비됐고 엄정한 심사과정이 설계됐다. 연구주제의 적정성, 연구자의 연구경력 및 능력평가, 소속 대학의 지원의지, ERC의 경우에는 참여기업체의 실질적인 공헌 의지 등 우리나라 과학기술 연구에서 유례가 없던 심사가 진행되어 1차 년도에 13개 우수연구센터가 뽑혔다. 1차년도에 뽑힌 13개 센터야말로 정말로 우수한 집단들이었다. 이후 매년 선정된 우수연구센터들은 우리나라 대학 연구에서 결정적 역할을 했다.

kunmochung@kast.or.kr

사진: 1995년 4월 우수연구센터로 지정된 전남대 호르몬연구센터의 현판식에 참석한 정근모 당시 과학기술처 장관(현판 왼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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