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미로 탈출의 해법은?

최근 1∼2년 사이 IT경기 회복의 견인차 역할을 했던 디지털 기기 업체들이 미궁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이 미궁 속에선 현재 휴대폰·디지털카메라·MP3플레이어·평판TV 등 분야의 글로벌 사업자들이 무한대의 경쟁을 펼치고 있다. 하지만 이들 업체의 영업이익률은 갈수록 떨어지고 있고 심한 경우 구조조정·사업부문 매각 등 전방위적 압박을 받고 있다.

 그나마 휴대폰·디지털카메라 등 업체들은 호황의 단맛이라도 봤으니 낫다. PDP·프로젝션 등 평판TV업계는 초장부터 죽을 맛이다. 가격 하락세를 원가절감과 구조조정으로 버텨 볼 요량이었겠지만 중도하차하는 기업이 부지기수다.

 현재 업체들이 빠져 있는 미궁은 디지털 상품의 속성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과거 아날로그 시대에는 각종 전자 부품을 결합한 어셈블리가 생산의 요체였으나 디지털 시대에는 반도체칩 하나에 제품의 핵심기능이 농축돼 있다. 신생 업체라도 핵심기술 보유 업체만 잘 잡으면 얼마든지 유사 상품을 내놓을 수 있다. 과거와 달리 제품을 차별화하는 것도 쉽지 않다. 이 같은 시장 특성 때문에 신규 업체들의 시장 진입이 아날로그 시대보다 훨씬 용이하다.

 현재 전세계적으로 무려 30여개 업체가 경쟁하고 있는 디지털카메라 시장은 이 같은 특성을 잘 보여준다. 과연 30여개 업체 중 몇 개가 끝까지 버틸 수 있을지. 별 도리 없이 업체들은 가격 인하라는 ‘전가의 보도’를 휘두를 수밖에 없다.

 과거 아날로그 시대처럼 기업 이미지만 믿고 덤벼들었다가는 역시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가전 제품의 명가를 자처하고 있는 소니의 추락은 무엇을 말하는가. 워크맨의 신화는 아이리버와 아이팟이라는 신병기 앞에 맥없이 무너졌다. 소니에 대한 소비자들의 맹목적인 신뢰에도 조금씩 균열이 생기고 있다.

 이 같은 디지털 시대의 특성을 감안할 때 머지않아 디지털 가전이나 소비자 전자 제품 시장에 대대적인 지각변동이 일어날 것이란 전망이 아주 공공연하다. 80년대 PC의 등장이 기라성 같은 메인프레임 업체들과 중대형 컴퓨터 업체들을 도태시켰던 것과 마찬가지로 유사한 현상이 재연될 것이란 예측이다. 결국 기초 체력이 약한 업체는 자연도태될 수밖에 없다.

 최근 일본 평판TV업계에 대대적인 합종연횡 바람이 불고 있다. 한국 업체들의 공세에 기가 질린 후지쯔가 LCD·PDP사업에서 철수하는 대신 관련 특허 기술을 샤프와 히타치에 넘기기로 했고 히타치는 마쓰시타와 PDP분야에서 협력하기로 했다. 세이코엡슨과 산요전기는 LCD 사업을 통합하기로 했고 히타치·마쓰시타·도시바 등 업체들은 LCD를 공동 생산하기로 했다.

 이 같은 일본 기업들의 움직임은 부실부문을 지속적으로 털어내고 경쟁력 있는 분야에 역량을 집중해야 생존할 수 있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한발 더 나아가 선진 기술업체와 연합전선 구축도 마다하지 않고 있다.

 결국 무한 경쟁과 가격 인하의 악순환이란 미로에서 빠져나오는 해법을 누가 먼저 찾느냐가 디지털 시장에서 살아남는 최선의 전략적 무기가 될 것이다.

현재 국내 기업들은 휴대폰·디스플레이·MP3플레이어·평판TV 분야 등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이 같은 반열에 오른 것은 국내 기업들의 과감한 시설투자와 미래를 보는 혜안 덕분이었다. 이 때문에 최근 국내 디지털 기기업체들은 IT버블 붕괴 후 최대 호황을 만끽했다. 그러나 디지털 분야의 선후발 업체 간 격차는 사실 간발의 차이에 불과하다. 그만큼 제품 개발 속도도 빠르고 주변 정세도 급변한다. 디지털 시대에 맞는 미로 탈출 해법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요구되는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장길수 국제기획부장 ksjang@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