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버전스와 디지털 라이프스타일]김영세 이노디자인 사장

“인류의 미래생활은 음악, 영화, 사진, 게임 등이 모두 하나로 이어지는 디지털 라이프가 될 것이다”

 2005년 벽두, 빌게이츠는 우리에게 컨버전스에 대한 새로운 화두를 던졌다. 지난 1월 5일(현지시각)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최근 열렸던 세계소비자정보가전전시회(CES: Consumer Electronics Show) 개막전야 기조연설에서 ‘디지털 라이프’라는 새로운 화두를 우리에게 던졌다. 디지털의 특징을 ‘생각의 속도’라고 강조했던 빌게이츠는 이제 ‘생각과 속도’를 넘어 인간의 실생활에서 만지고, 실감하고, 응용하는 디지털 라이프 스타일 시대로 넘어왔음을 선언한 셈이다.

 빌게이츠는 ‘디지털 라이프’라는 말에 다시 의미를 부여했다. “언제 어디서나 간편하게 음악과 비디오를 즐길 수 있는 디지털 라이프 스타일이 미래 인류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할 것”이며, 이를위해 “다양한 투자를 통해 기술적 혁신을 이루어 내야 한다”고. 빌게이츠는 이제 기업은 디지털 기기를 만드는 곳이 아니라 사람의 문화를 만드는 곳이며, 이를 위해 ‘다양한’ 투자와 ‘기술적’ 혁신이 이뤄져야 함을 강조한 것이 아닐까.

 빌게이츠는 이 말을 던지면서 아주 작은 빨강색 MP3플레이어를 들고 있었다. 바로 컨버전스를 통한 디지털 라이프를 구현한 대표적인 상품이라며. 그 제품은 바로 필자가 설립한 미국의 이노디자인이 디자인하고 우리나라의 레인콤이 아이리버 브랜드로 출시한 하드디스크 타입 MP3플레이어 제품(모델명 H10)이었다. 이 빨강색 MP3플레이어는 600여개 미디어를 통해 전세계에 순식간에 알려졌다. 그 순간 나는 매우 흥분했고, 전율을 느꼈다. 빌게이츠가 아이리버 ‘H10’을 꼽은 것도 중요했지만, 나는 이기적으로 ‘2005년을 계기로 해서 이 세상이 모두 바뀔 것이라는, 내가 그 디지털혁명이 문화혁명으로 변하는 한 가운데 있다’는 사실만으로 감격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달라진 한국=나는 1985년부터 한해도 빠짐없이 CES를 참관했다. 당시 미국 실리콘밸리에 산업디자인 전문회사인 이노디자인을 설립한 나는 매년 1월 라스베이거스의 CES 전시와 함께 새해를 시작했다. 당시 한국 기업들의 기술력과 디자인, 전시장 디스플레이는 참담했다. 새로운 모바일 가전과 미래 첨단 세상을 제시하고 있을 때 우리 기업은 고작 컬러TV와 세탁기를 초라하게 출품하고 있었다. 전시장 모습도 칸칸히 칸막이를 해놓고 제품하나에 판넬로 제작된 설명서가 고작인 ‘벌집’ 부스가 태반이었다.

 전시장 내 직원들은 일본 부스에서 나오는 사람들의 왁자지껄한 소리와 음악소리, 화려한 이벤트에 잔뜩 주눅 들어 있기 마련이었다. 그러다 짬이 나면 직원들은 전시회 참관 보고서를 쓰기 위해 일본과 미국 전시장을 기웃기웃 거리면서 카메라를 들이대고 열심히 사진을 찍어 댔다. 제품 카탈로그만 서너박스를 모아야 성이 차곤 했다. 우리의 80년대 90년대는 이렇게 지내왔다.

 그러나 2005년의 CES는 확연히 달랐다. 우리나라 전자회사들은 이제 라스베이거스 CES 컨벤션 홀의 가장 중심에 있었다. 가장 큰 전시관을 차지하고 기술과 디자인에 앞선 신 제품들을 세계인들 앞에 내놓았다. 우리 제품 앞에는 역설적이게도 무수한 미국·중국·일본 사람들이 디지털카메라를 들고 연방 셔터를 눌러대고 있었다. 20여년간 CES를 돌아다닌 나는 그 변화를 확실히 느낄 수가 있었다. ‘디지털 라이프 스타일’이 가져온 변화였다.

 바햐흐로 우리가 주도하는 21세기가 이제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최첨단 기술개발이 가져온 혁명이 아니라 사람의 삶을 변화시키는 문화적 코드로서의 디지털이 다가오면서 시작됐다. 선진국인 미국에서도 이제야 디지털 TV가 보편화되기 시작했으며, 전 세계인 모두 손에 휴대폰을 들고 다니는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스타벅스 앞에서 노트북을 두드리는 사람, MP3플레이어를 귀에 꼽고 다니는 힙합소년, 바쁜듯이 걸어가는 직장인의 서류가방에는 모두 디지털 기기들이 한 두개쯤은 들어 있다. 기술혁신의 대명사였던 ‘디지털’이 문화변혁을 일으키는 ‘라이프 스타일’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소비자는 디자인을 선택한다=언제 어디서나 사용자에게 제공되는 유비쿼터스 정보서비스, 그리고 인류의 삶을 편리하고 풍요롭게 만들어 주는 홈 네트워킹과 디지털 엔터테인먼트 서비스 등은 이제 시작되고 있다. 디지털 기술이 보편화·규격화 되면서 소비자 문화적 코드를 얼마나 빠르고 완벽하게 읽어내는가에 따라 관련 업체들의 경쟁력 순위가 뒤바뀌고 있다.

 0과 1로 조합된 디지털 신호는 다양한 신제품을 양산하기에 이르렀다. 유사한 제품, 동일한 성능을 갖춘 제품들이 무더기로 쏟아지고 있다. MP3플레이어는 전세계 수백개 업체에서 양산중이다. 그나마 휴대폰, 전자사전 등과 결합된 다양한 컨버전스 제품도 쏟아지고 있어, 제품 종류는 헤아리기 어렵다.

 소비자 측면에서 보면 선택권이 무한대로 넓어진 셈이고, 기업 입장에서는 경쟁이 그만큼 치열졌다는 말이 된다. 소비자는 그저 제품별로, 용량별로, 가격별로, 회사별로 원하는 제품을 구입하면 그만이다. 즐기기 위해 디지털 상품을 선택하는 소비자들의 뜻에 따라 디지털 관련 기업들이 살아나고 죽어가는 시대가 왔다. 대량생산 대량소비체제가 아니라 소비자 지향적인 생산체제와 판매체제를 구축해야만 경쟁에서 살아남는 시대가 온 것이다.

 거기에 바로 ‘디자인’의 선택권이 있다. 나는 이것을 ‘디자인 라이프 스타일’이라고 한다. 소비자의 눈과 마음에 쏙 드는 상품을 개발할 수만 있다면. 결과는 당연히 ‘대박’이 될 것이다. 디자인의 긍극적인 목표는 쓰기 편리하고 보기 좋고 생산이 수월해서 가격 경쟁력까지도 갖추는 일. 우수한 디자인의 결과물이 소비자로부터 선택되는 히트상품이라는 이론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따라서 소비자가 선택하는 상품을 지속적으로 개발해 낼 수 있는 기업은 살아 남고 소비자로부터 외면 당하는 상품을 개발하는 기업은 서서히 이세상 에서 사라지게 된다.

 ‘디자인’이 기업의 생사를 좌우하는 요소가 됐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다. 인류의 삶을 디지털기술이 풍요롭게 해주고 있는 21세기에 들어서는 ‘디자인’의 역할은 한층 더 중요해졌다. 쏟아져 나오는 디지털 기술혁신의 결과물들을 소비자들 입맛에 꼭 맞게 만들어 내는 과정이 바로 디자인이기 때문이다. 마치 음식을 만드는 재료들이 같은 상황에서는 주방장의 솜씨가 손님들을 끌어 모아서 결국 ‘맛집’으로 성공시키는 이치와 같다. 표준화를 통해 누구든지 상용화할 수 있는 커머디티(Commodity)가 된 디지털 세상에서 디자인은 그야말로 소비자의 문화적 패턴을 설계하는, 이 패턴과 제품을 일치시키는 작업이다.

 ‘필요’ 보다는 ‘멋’이 구매심리를 좌우하게 된 디지털 상품 시장에서는 소비자들은 어떤 상품이 자신의 이미지와 가장 적합한 것인지를 중요시 한다. 유능한 디자이너들은 이런 소비자의 마음을 읽는다. 기술의 한계 또는 가능성을 이해한다. 그리고 미래의 생활패턴을 예측한다. 이를 토대로 적절한 기술을 찾아내서 미래의 소비자에게 만족을 줄 수 있는 상품 아이디어를 시각화(형상화)해서 적절한 제조방식과 합리적인 양산과정을 거쳐서 가격 경쟁력 있는 상품을 탄생시킨다. 결과물이 아름답고 소비자의 눈과 마음에 쏙 드는 컬러와 스타일이어야 함은 기본이다. 소문이 나서 손님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식당의 맛을 만들어 내는 주방장의 솜씨처럼 소비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솜씨를 갖춘 디자이너들이 기업을 성공시킨다. 바로 ‘창조적인 사용자의 개인적 정체성(CUPI: Creating User`s Personal Identity)’을 파악하는 방식으로 상품개발과 디자인을 접근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비자가 휴대폰을 선택할 때는 사용성, 편리성, 가격, 브랜드 이외에도 구매하고자 하는 휴대폰이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남들에게 보여줄 것이라는 것을 의식한다. 소비자들은 상품구매 이전에 구매 하려는 상품이 자신의 정체성에 적절한 것인지를 스스로에게 묻는다. 상품의 컬러와 스타일도 자신의 모습과 적절히 어울려야 하기 때문이다. 휴대용 정보기기들은 소비자들의 경제적여건, 문화적 수준, 외모와 지식수준을 평가하는 한부분이 됐다. 이는 휴대용 정보기기가 소비자의 소비패턴과 삶의 유형을 디자인하는 단계이기도 하다. 남들보다 미래에 먼저 가 볼 수 있는 창의적인 사람들, 소비자가 어떤 상품을 필요로 하는지를 예측할 수 있는 전문가들, 디지털 기술의 흐름을 읽고 어떤 기술이 어떤 기업에 의해서 개발되고 있는지의 정보에 민감한 전문가들, 그리고 상상력이 앞서서 미래의 개념을 신상품의 형태로 시각화해서 프로토타입(Prototype)으로 경영진과 기술자들에게 미리 표현할 수 있는 디자이너들이 절실히 요구된다.

 ◇디지털과 디자인, 우리 인류의 꿈=미래에는 인류의 삶이 어떤 모습일까. 디지털 기술 혁신이 이어지는 덕분에 우리들은 변화에 민감해지고 항상 새로운 기술과 상품에 대한 호기심을 갖게 됐다. 이미 인터넷을 통해서 듣고 싶은 음악과 보고 싶은 영화를 다운로드 받아서 손 안에 들어오는 문화생활을 즐기기 시작한 인류에게 어떤 즐거움을 줄 수 있는가는 디지털 분야 기업들의 최대 고민이다.

 때론 쏟아져 나오는 디지털 컨버전스 상품과 서비스는 소비자를 혼돈시키기도 한다. 소비자로서 오늘의 선택이 머지 않아 신상품과 신서비스에 밀려 후회스런 구매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도 승승장구하는 기업이 있다.

 최근 영국의 시사 경제 주간지인 1월 14일자 ‘이코노미스트(Economist)’ 지는 한국의 삼성전자가 디지털 컨버전스의 전성시대에 들어와서 막강한 기술력과 브랜드 마케팅력의 적절한 조화를 이루면서 소비자들의 신뢰를 얻고 있다고 보도했다. 특히 기술력과 디자인력으로 디지털 컨버전스 상품군을 확장해 나감으로써 브랜드 마케팅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고 했다. 신기술 신상품을 기다리는 소비자들이 자신의 구매선택이 불확실할 경우 신뢰할 수 있는 브랜드를 선호할 것이라고 예측한 삼성의 전략은 적중했다는 평가도 내렸다.

 디지털 기술의 혁신은 인류에게 꿈을 실현시키는 훌륭한 방식들을 제시한다. 또한 디지털 기술의 혁신은 사용자로 하여금 서비스와 상품을 잘 이해하고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휴먼 인터페이스(Human Interface)의 진화를 통해 소비자에게 더욱 편리하고 즐거운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이제 ‘디자인’에 대한 정의를 다시 한번 내려야 할 것 같다. ‘디자인’이란 인류의 꿈을 시각화하는 작업이다. 디자인의 출발은 ‘만약 우리가 인류의 꿈을 실현할 수 있는 어떤 신상품을 만들 수만 있다면’에서 시작된다. 역설적이게도 나는 ‘디자인’이 우선돼야만이 ‘기술’이 따른다고 믿고 있다. ‘디자인’은 아무 제한 없이 자유롭게 생각하는 인간의 상상력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소비자에게 환영 받는 히트 상품을 디자인하기 위해서는 사용자의 입장에서 판단하는 일이 디자인 프로세스의 첫 단계이다. 머지 않아 최종 사용자의 입장에서 신상품과 서비스를 찾아내는 방식이 유일한 기업의 생존 방식이 될 것이다.

 21세기의 ‘디자인’은 기술(Technology)과 상술(Marketing)을 넘어선 ‘인술(人術)’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 ‘디자인’은 사용자를 가장 잘 이해하는, 그리고 사랑하는 자세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우리들은 사랑하는 상대방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엇을 선물하면 기뻐할 것인가를 골똘히 생각하 듯 소비자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디자인 된 상품은 히트상품이 될 것이다. 인류의 미래의 삶을 풍요롭게 해 주는 디지털 기술과 또한 이러한 새로운 기술의 혁신을 초래하는 인간중심주의적인 디자인 정신은 디지털 라이프 스타일을 통한 인류의 꿈을 실현시켜 주는 21세기의 두가지 가장 커다란 힘이다. D(Digital)+D(Design)=D(Dream) 이라는 새로운 공식이 성립되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ceo@innodesign.com

*김영세 사장은...

△서울 생 △서울대 산업디자인학과 졸업 △미 일리노이대 산업디자인과 학사·석사 △美 두퐁 디자인 컨설팅 △美 일리노이대 산업디자인과 교수 △美 GVO , 프로덕트 디자인 매니저 △美 ID FOCUS 설립 △美 이노디자인 설립 △이노디자인 코리아 설립 △한국디자인브랜드경영학회 이사

수상

 △1990년 미국산업디자이너협회(IDSA) IDEA 동상 수상(골프백 ‘PROTECH’) △1993년 미국산업디자이너협회(IDSA) IDEA 금상 수상 (동양매직 가스버너 ‘Lobster’) △1997년 한국 산업디자이너협회(KAID) 한국산업디자인상 대상 수상 (CD 케이스 ‘CDX’) △1999년 한국 Good Design전 대통령상 수상 (LG전자 DIOS 냉장고) △2000년 미국산업디자이너협회(IDSA) IDEA 은상 수상 (Zipper Concept Design) △2000년 미국 Business Week ‘2000년 베스트프로덕트’선정 (LG Smart Phone) △2001년 대한민국 디자인 및 브랜드 대상 ‘디자인 공로’부문 산업포장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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