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스]전문가들이 말하는 게임 등급분류 해법

게임 등급분류 대안은 없는가.

영상물등급위원회 전·현직 심의위원의 수뢰파문으로 등급분류 제도에 대한 개혁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급기야 김수용 영등위원장이 위원직을 사퇴했지만 영등위를 향한 불신은 좀처럼 가시지 않고 있다.

더이상 영등위에서 심의를 받을 수 없다는 불만도 여기저기서 터져나오고 있다. 곪을 대로 곪은 현재의 영등위 체제를 완전히 뜯어 고치지 않고서는 등급분류가 이제 더이상 정당성을 부여받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셈이다.

그러나 문제는 대안이다. 수뢰파문 이후 영등위를 성토하는 목소리는 쏟아지고 있지만 정작 구체적인 대안에 직면하면 명쾌한 답을 못 내놓고 있다. 물론 백인백색의 의견이 제기되고 있지만 건설적인 논의과정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사정이 이쯤되자 일각에서는 현재 영등위 체제에서 한 걸음도 못 나갈 것이라는 우려마저 고조되고 있다. 과연 대안은 없는가. 다행히 전문가들은 몇몇 대안들을 제시하고 있다. 이미 해외에서 검증받은 모델도 충분히 검토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제 소비적인 불만 토로보다 구체적인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 등급분류 어디로 가야 하나?

영등위 수뢰파동 이후 게임업계의 가장 큰 관심사는 앞으로 어디서 등급분류를 할 것인가에 맞춰져 있다. 여기에는 지금까지 불신의 대명사였던 영등위 체제로는 더이상 등급분류를 할 수 없다는 인식이 깔려있다. 이 때문에 각종 추측과 소문이 꼬리를 물고 있다.

현재 새로운 등급분류기관으로 거론되고 있는 곳은 한국게임산업개발원, 한국게임산업협회, 청소년보호위원회 등이다.

게임산업개발원의 경우 진정한 민간자율로 가기 위한 과도기적 기관으로, 게임산업협회는 이번 기회에 업계 자율로 가자는 자율에 무게를 둔 목소리가 반영됐기 때문이다. 반면 시민단체나 영등위 위원들이 조심스럽게 거론하고 있는 청소년보호위원회의 경우 게임을 더이상 산업보다 청소년보호의 입장에서 강력하게 규제해야 한다는 주장의 반영이다.

그러나 이들 기관은 하나같이 허점을 갖고 있어 현행 영등위 체제가 당분간 지속될 수밖에 없다는 의견도 적지 않다.

실제 문화부 산하 게임산업개발원이 주축이 돼 새로운 심의기구를 만들면 관주도의 검열문화가 재현된다는 시비를 불러올 수 있는데다 문화부의 입김이 크게 작용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업계 주도의 협회의 경우 아직 공신력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는데다 협회가 등급분류를 시행할 정도의 역량을 갖췄는지도 미지수라는 반응이 지배적이다.

청소년보호위원회가 등급분류를 맡는다면 더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킬 것으로 예상된다. 청소년보호라는 다소 낡은 논리만으로 창작의 산물인 콘텐츠를 제단하는 원론적인 문제제기부터 다른 콘텐츠와 형평성까지 다양한 문제제기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 전문가 그룹 새판짜기 요구

그러나 전문가들은 등급분류제도 개혁의 논점은 어디서 등급분류를 하는가 보다 어떻게 등급분류를 할 것인가가 더 중요한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다.

수뢰파동으로 ‘빙산의 일각’이 드러난 지금까지 영등위 문제는 등급분류제도 자체와 운영 등 구조적인 문제가 해소되지 않고는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강원대 유승호 교수는 “등급분류를 어디서 할 것인가 하는 명제에는 민간자율과 정부의 입김이 작용하는 공공기관 등 크게 두가지로 나뉠 수 있다”면서도 “문제는 영등위처럼 불투명한 심의위원의 인선, 민주적이지 못한 심의과정, 로비에 취약한 구조 등이 재현된다면 어디에서 하든 문제의 본질을 해결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게임산업개발원 김민규 박사도 “지금의 영등위가 심의를 계속하더라도 조직구성부터 운영 프로세스를 완전히 뜯어 고치면 지금의 영등위와는 전혀 다른 제2의 영등위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주목받는 등급분류 대안들

새판짜기를 요구하는 전문가들은 실현 가능한 모델을 몇가지 제시하고 있다. 이같은 모델들은 유럽이나 미국 등 선진국에서 이미 검증받은 내용을 상당수 포함하고 있어 설득력도 갖추고 있다.

우선 가장 많이 거론되는 대안은 미국과 유럽의 모델을 한국적 상황에 접목하는 것들이다.

미국의 ESRB와 같은 비영리단체에 의한 민간자율심의를 주장하는 전문가들은 처음에는 시행착오를 거치지만 이 제도가 자리 잡으면 업계나 소비자들의 만족도가 가장 클 것이라고 강조한다.

경희대 권준모 교수는 “지금 당장 불가능하더라도 이상적인 목표를 세우고 추진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과도기적 기구를 갖더라도 점진적으로 민간자율기구로 넘어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반면 복수 심의체계와 심의위원 풀제 등을 골자로 한 유럽식 모델도 유력한 대안으로 제시하는 전문가들도 많다.

유승호 교수는 “한번에 끝나는 심의는 객관성 확보 차원에서 결점을 갖고 있다”며 “배심원제와 흡사한 일반 시민과 전문가 집단의 심의 등 적어도 2차례의 심의를 거치는 심의 프로세스의 대개혁”을 제기했다.

복수의 등급분류기관을 양성화하자는 목소리도 설득력을 갖추고 있다. 영등위 수뢰파동과 같은 문제가 발생하면 과감하게 등급분류기관을 교체한다면 등급분류기관들이 자연스럽게 경쟁하고, 이를 통해 심의의 투명성과 경쟁력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성신여대 황승흠 교수는 “문화부가 입법 추진 중인 게임산업진흥법 초안에는 문화부장관이 등급분류기관을 지정할 수 있는 조항이 삽입돼 있어 복수의 등급분류기관이 등장하면 이같은 시도는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결국 전문가들은 궁극적으로 민간자율에 의한 등급분류를 이상적인 목표로 상정해놓고, 현재 국내 상황에 맞춰 과도기적 대안을 모색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중앙대 위정현 교수는 “민간자율로 가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지만 현재 기업의 역량이나 사회적 인식을 고려할 때 과도기적 체계를 거칠 수밖에 없다”며 “당분간 업무공백을 막기위해 영등위 체제를 유지하되 민간자율을 준비하는 과도기적 등급분류기관을 병행 운영하는 것도 좋은 시도”라고 말했다.

<장지영기자 장지영기자@전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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