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 해외 전략시장을 가다](3)미국편(상)실리콘밸리

“실리콘밸리가 돌아왔다” 최근 국내 언론 보도에 자주 등장하는 말이다. 샌프란시스코나 프리몬트로 새너제이로 내려가는 101도로, 880번 도로가 다시 교통체증이 심각하다는 보도도 나왔다. 팔로알토의 유명한 식당을 예약하려면 2000년의 인터넷거품 때처럼 몇 시간을 기다려야 하고 새너제이의 비즈니스호텔에 투숙하려면 미리 예약하지 않으면 힘들다는 소문도 돌고 있다. 실리콘밸리의 벤처투자자들도 다시 고수익이 될만한 회사를 찾아 돌아다니고 있다.

◇실리콘밸리, 죽음의 문을 빠져나온 수준=새너제이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골목에 새로 지은 인터넷 기업 이베이 빌딩에는 ‘채용중(Now We’ re Hiring)’이란 간판을 입구에다 크게 배치해 놨다. 분명 실리콘밸리는 지난 3년간의 깊은 침체를 벗어나 다시 활기를 찾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실리콘밸리에 상주하는 주재원이나 현지에 사정이 밝은 소식통에 의하면 사정은 다르다.

캘리포니아에서 20년 째 살고 한 때 60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사장었으며 현재는 인터넷 회사를 차려 벤처투자자들의 투자를 받기 위해 뛰고 있는 구철회 씨(61)는 “실리콘밸리의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길어야 고작 일주일 반짝 취재하고 가는 언론 보도나 통계자료에 현혹되지 말라”고 주문한다. 그리고 “일부 대기업을 제외하고 실리콘밸리에서 살아남은 한국의 중소기업이나 벤처는 없다”라며 “다시 실패하지 않으려면 준비를 철저히하고 미국에 오라”고 단호히 말한다.

캘리포니아 주 정부에서 발행하는 공식 통계인 ‘캘리포니아 노동시장 분석(California Labor Market Review)에 따르면 실리콘밸리의 실업률은 지난해 5.9%에서 올 10월 현재 5.5%로 떨어졌고 공실률도 17.6%에서 16.6%로 내려갔다. 마치 실리콘밸리가 분위기만 살아난 것은 아닌 듯 보인다.

그러나 실리콘밸리에서 반도체, 보안, 통신 벤처의 홍보를 담당하는 글로벌프레스(GlobalPress)의 엄가드 사장은 “일부에서는 최근 실리콘밸리가 넷스케이프가 상장하기 1년 전이나 18개월 전처럼 된 것처럼 떠들고 실업률이 떨어지고 있다고 좋아하지만 실리콘밸리의 일자리는 이미 지난 2000년에 비해 거의 20%가 줄었습니다. 일자리가 줄어든 상태에서 실업률이 떨어지고 있다는 말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라고 말한다. 새너제이 지역 유력지 ‘머큐리’는 지난 3년간 실리콘밸리는 마치 1980년대 초 대공황으로 인해 일자리의 13%가 줄어든 디트로이트시 이후 가장 심하게 붕괴 된 곳이라는 지적을 한 바 있다.

엄가드 사장은 “일부 회사들이 두 자리 수 성장을 한다고 하고 대규모 스톡옵션을 받았다는 소문도 들립니다. 실리콘밸리가 활황을 띠고 있다는 말은 거품 붕괴 이후 약 20만 명의 일자리를 잃었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고 하는 말입니다”라고 강조했다.

혹시나 깊은 수렁에서 빠져나왔다는 소문만 듣고 예전처럼 ‘실리콘밸리’라는 상징성만 갖고 무모하게 도전하기에는 겨우 죽음의 문(Death Door)에서 탈출한 수준이라는 것이다.

◇한국기업, 준비 철저히 해야=최근 LA에서 휴대폰 벨소리 업체를 창업, LG전자 및 팬텍앤큐리텔의 현지법인에 공급을 시도하고 있는 엠투고의 이지선 사장(40)은 “미국에서는 아직 벨소리 다운로드가 생소합니다. 당장 큰 수익을 올려 대박을 터트리기보다는 향후 3∼5년 후를 보고 착실히 준비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아직은 스터디에 충실하겠다는 입장이다.

그동안 중소·벤처기업은 한국에서 성공을 이룬 후 미국에 진출하면서도 제품 매뉴얼 하나 제대로 갖춘 기업이 드물고 미국 소비자들의 까다로운 패턴을 이해하고 전략적으로 접근하고 있는 기업도 없었다.

중국과 대만의 기업이 미국에서 배우고 자란 인재들을 과감하게 등용, 제품과 기술의 장점을 선전하기에 앞서 ‘시장’을 보고 접근한다면 아직 한국 기업들은 “제품이 좋고 기술이 훌륭하니 써보라”라고 공급자 위주의 전략을 버리지 못했다. 미국에 사무실 하나를 더 두고 채용은 늘리는 것보다 시장 접근 전략을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는 지적이다.

아이파크(iPark) 실리콘밸리의 이종훈 소장은 “미국 현지 시장에 정확한 분석 없이 도전, 중국·대만에 밀리고 실패를 거듭했던 한국 기업들이 실리콘밸리가 침체를 거듭했던 지난 3년간 달라졌는지 모르겠습니다”라며 “회사가 겉모습보다는 내실이 있는가. 철저히 현지 시장을 분석하면서 미국에 진출하고 있는가의 여부를 봐달라”고 말했다.

실리콘밸리의 잃어버린 3년 그리고 불황 탈출과 같은 변화보다 중요한 것은 그곳에서 성공을 꿈꾸는 한국기업의 근본적 변화라는 평범한 진리가 실리콘밸리에 있었다.

새너제이(미국)=손재권기자@전자신문, gjack@

[인터뷰]이종훈 아이파크 실리콘밸리 소장

“한국의 중소·벤처 기업은 대만이나 중국에 비해 미국에서 성공한 사례가 드뭅니다. 그들보다 미국시장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제품의 기술력보다 수요자 중심의 마케팅력이 시장을 판가름하고 있으니까요.”

아이파크 실리콘밸리 이종훈 소장은 미국에 진출하려는 한국 기업들에 철저한 현지화와 수요자 중심의 계획을 보다 섬세하게 세워야한다고 주문했다.

“예를 들어 대만과 중국업체들은 졸업입학·크리스마스 시즌에 맞춰 현지화된 인력들이 마케팅을 전담하고 있으나 하직 한국업체들은 기술자들이 자신들이 필요할 때 나와 제품이 좋다며 사달라고 강요하고 있는 형편이니까요. 교육과 컨설팅에 들이는 사회적 비용을 줄여 한국에서 충분히 준비 후 미국으로 나와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이 소장은 한국에서 적극 추진중인 ‘IT R&D센터 유치’라는 이름도 ‘국제(또는 한미) IT R&D 협력’ 등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에서 R&D센터를 유치한다는 것은 미국의 입장에서 본다면 인력 및 회사가 빠져나간다는 뜻이므로 미국인이 민감하게 받아들 일 수밖에 없다. 결국 국내 비즈니스 환경에 악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것.

“미국이 한국 기업에 진출할 때 어떤 경로를 거쳤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처음에는 유통 채널을 확보하고 가격 수준을 맞췄으며 그 다음에는 브랜드를 강화하지 않았습니까. 현지 시장 분석은 가장 중요하고 먼저 해야할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종훈 소장은 최근 아이파크가 세계 IT유통 전시회(바비젼2004)에서 최고 국제협력상을 수상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CES나 컴덱스와 같은 큰 전시회는 신기술 과시의 성격이 강하지만 IT유통전시회는 주문자상표부착(OEM)이나 주문자개발생산(ODM) 채널을 확보하는데 효과적인 것이 현지의 현실이다.

“중소·벤처 기업이 대기업들과 같은 수준의 R&D를 수행할 수는 없습니다. 핵심 기술은 사오는 대신 비즈니스·기술 프로세스를 잡을 수 있죠. 소비자의 심리나 프로세스(또는 플로우 Flow)를 장악하는 것이 강소국형 모델인 것 같습니다.”

*아이파크 실리콘밸리 `화려한 변신`

실리콘밸리에서도 가장 잘나간다는 기업이 모여있는 노스퍼스트가(North First St.)의 중심에 위치해 있는 아이파크는 몇 해 전 만해도 공실률과 불협화음으로 국정감사 때마다 빠지지 않고 지적받아왔다. 국민의 혈세로 지었으나 효율이 떨어진다는 것.

그러나 이종훈 소장이 새로 부임하고 분위기를 일신하면서 새롭게 변신하고 있다.

입주율이 65%에 지나지 않았으나 올 연말까지 100%를 채울 것으로 예상되고 입주 기업도 엠텍비전, 픽셀플러스, 넷피아, 한글과컴퓨터 등 우량 벤처 기업이 속속 자리를 틀고 있다. 입주 업종도 내장형 소프트웨어, 디지털 콘텐츠, 패키지 소프트웨어, 시스템IC 등 미국 현지화가 가능하며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고 있는 품목으로 바꿨다.

목표도 확실히 했다. 2008년까지 아이파크를 통해 미국 나스닥에 진출하는 기업을 매년 1개씩 만들어 보겠다는 것. 최근 나스닥에 성공적으로 등록, 화제가 된 리디스테크놀로지가 좋은 사례가 됐다.

이를 위해 아이파크는 △9대 성장동력이나 IT839 전략에 맞는 업종을 개발하고 △미국 현지 틈새 시장을 공략하며 △타임투마켓 시간을 최소화하는 전략을 구사, 입주 업체들에 실질적인 도움을 줄 예정이다.

한국이 동북아 허브를 지나 IT R&D의 중심국가를 건설하고 세계적인 연구실험대(테스트배드) 역할을 하는데 실리콘밸리가 도움을 주는 것이 최종 목표다.

아이파크 김종갑 이사는 “입주 회사도 현재 29개 회사에서 늘리지 않고 선택과 집중을 통해 내실있는 우량 기업을 선정, 미국에서 성공한 기업을 만들어야 합니다. 외국에서 아이파크의 존재에 대해 놀라고 있지만 그 내용까지 벤치마킹할 수 있게끔 해야합니다.”라고 말했다.

실리콘밸리(미국)=손재권기자@전자신문, gja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