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를 거쳐 파리로 가는 유럽횡단 기차 안에서 만난 미국 청년 제시와 프랑스 여대생 셀린느. 그들은 충동적으로 비엔나에 내려서 해뜨기 전까지 14시간 동안 밤거리와 카페, 공원을 거닐며 하룻밤을 보낸다.
그러나 그들은 확신하지 못한다. 비록 강렬하게 서로를 향해 이끌리면서 불꽃 같은 감정이 타올랐지만 이것이 사랑인가? 6개월 뒤에 만나기로 하고 아쉬운 이별을 했던 ‘비포 선라이즈’의 주인공들은 무려 9년 만에 재회를 한다. 그것이 ‘비포 선셋’이다.
베를린 영화제 은곰상을 받았던 ‘비포 선라이즈’의 리차드 링클레이터 감독과 에단 호크, 줄리 델피 등 9년전의 황금 트리오가 멤버 체인지 없이 그대로 투입된 ‘비포 선셋’은 역시 ‘비포 선라이즈’처럼 유쾌한 대사로 상황을 이끌어간다.
무슨 일인가 있을 듯 없을 듯 밤의 커튼 속으로 모든 것을 감춰버렸던 9년전과는 다르게, 이제는 지난 일들을 명확하게 이야기한다. 사랑에 대한 환상이 질풍노도의 청춘을 지배하고 있었다면 9년이 지난 지금 그들에게 사랑은 더 이상 환상이 아니라 현실이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소설로 써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제시, 파리의 서점에서 작가와의 대화를 하다가 셀린느와 재회한다. 그러나 제시는 결혼을 했고 셀린느는 남자 친구가 있다. 80분 뒤 제시는 공항으로 떠나야 한다. 그러나 9년 전처럼 그들은 여전히 서로를 갈망한다. 처음에는 지난 이야기를 하면서 추억을 끄집어 내고 다음에는 현실의 자신의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그들은 9년전 비엔나에서 두 번 섹스를 했다. 그러나 남자는 기억하지 못하는 척 한다. ‘비포 선라이즈’를 본 관객들도 그들이 정말 섹스를 했는지 안했는지 모두 생각이 달랐던 문제가 ‘비포 선셋’에서는 명쾌하게 정리되는 것이다. 그러나 ‘비포 선라이즈’의 14시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짧은 시간만 그들 앞에 남아있을 뿐이다.
‘비포 선셋’은 베시가 책 홍보를 위해 작가와의 대화를 하고 셀린느와 대화를 하는 10분을 포함, 제시가 공항으로 떠나기까지 남은 80분, 총 90분의 런닝타임을 갖고 있다. 영화상영 시간과 극중 인물의 시간을 리얼 타임으로 맞춘 ‘비포 선셋’의 재미는, 역시 두 사람의 생동감 있는 대사다.
‘비포 선라이즈’가 비엔나라는 도시의 영화적 발견이었다면 ‘비포 선셋’은 셀린느가 거주하는 파리의 일상적 삶을 담고 있다. 관광객의 시선으로 바라보이는 파리가 아니라, 삶의 구태의연함이 묻어 나는 파리의 모습을 감독은 원했고 그것은 두 인물에게 훨씬 현실감을 부여해준다.
각자 자신의 현재의 사랑에 대해 회의하면서 다시 서로를 갈망하는 제시와 셀린느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공감을 주는 이유는 일상의 지층에서 길어 올린 이야기를 섬세한 관찰과 살아있는 인물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영화 평론가·인하대 겸임교수 s2jazz@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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