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억의 화요초대석]정재서 이화여대 교수

“우리 어린이들은 그리스 로마 신화의 내용은 잘 알면서 한국이나 동양의 신화는 거의 모르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서양신화를 보며 상상력을 키운다면 국적 없는 상상력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더게임스 창간호부터 7개월 동안 독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던 이화여대 정재서 교수의 ‘잊혀진 한국신화의 원형을 찾아서’가 이번 호를 끝으로 연재를 마치게 된다. 그동안 좋은 글을 써 주었던 정 교수를 만나 우리 신화가 주는 상상력의 의미와 독자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얘기들을 들어봤다.



정재서 교수는 “우리에게도 환상적이며 뿌리깊은 신화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서양의 신화가 전부인 것 처럼 알고 자라는 어린이를 볼 때 가장 안타깝다”며 더게임스와 그동안 해온 작업을 통해 어른들이 먼저 우리 신화에 관심을 갖고 이것을 어린이들에게 전달해 주는 역할을 해야 할 것이라고 당부했다.

정 교수는 최근 출판계와 영화가에 그리스·로마신화와 북유럽 신화, ‘반지의 제왕’, ‘해리포터 시리즈’ 등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것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을 피력했다. 여기에 소개되는 신 중의 신 ‘제우스’와 끝없는 질투심을 드러내는 ‘헤라’를 비롯해 아폴론, 디오니소스 등은 모두가 지구 저편을 배경으로 한 신들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리스·로마신화가 세계 문화의 흐름을 알 수 있는 원류라 해도 우리 국민들이 서양의 신화만 알고 우리 신화를 모르는 편식현상은 너무도 심각하다는 것이다.

# 우리에게도 그리스 로마와 견줄 만한 신들 많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제우스에 상응하는 황제, 헤라에 상응하는 여와를 비롯해 염제 신농, 영웅 치우 등 흥미진진한 신들과 그들이 만들어내는 드라마틱한 이야기들이 존재하고 있다. 다만 이런 것들이 우리의 관심 밖에서 잊혀지고 있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정교수는 기억속에서 잊혀진 우리의 신화를 현대에 다시 살려내는 일에 혼신의 힘을 쏟고 있다. 단군의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바람을 다스리는 풍백, 비를 다스리는 우사 등은 중국 신화에도 등장하는 신들이다.

정교수는 최근 두권의 책을 냈다. 첫편인 ‘이야기 동양신화(중국편) 1’은 지난 7월에, 다른 하나는 최근에 출판을 마쳤다. 정 교수 이 두 권의 책이 상상력에 목말라 있는 우리 어린이들 뿐만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우리의 상상력에도 뿌리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교수는 이 책에 수록된 모든 신화 이야기가 철저히 중국 고대 문헌의 원전 자료를 바탕으로 이루어졌으며, 이미지 자료를 최대한 활용했다고 말했다. 그는 신화 내용을 제대로 구현하고 있는 고전 이미지를 구하기 위해 중국, 일본, 대만 등지의 박물관과 도서관, 서점 등을 몇 차례나 왕래하며 관련된 중요 자료들을 거의 망라했다.

이 책에서는 먼저 해당 중국 신화의 의미를 충분히 설명한 뒤, 그리스 로마 신화 등 서양 신화와 비교해 그 차이점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표준으로서의 지위를 해체하고, 중국 신화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이다.

그는 “서양적 신화관에 빠져 있는 이에게는 책 속에 등장하는 신들의 모습이 너무 낯설 수도 있다”고 걱정했다. 죽음과 생명을 나타내는 여신들을 보자. 현대에 이르기까지 서양 신화에 등장하는 아프로디테(비너스) 같은 여신은 여전히 미의 화신이나 아름다움을 상징해 미모를 자랑한다. 그러나 동양의 비슷한 수준의 여신인 서왕모의 원시적인 모습은 아름다움은 고사하고 절반은 짐승으로 해괴하기까지 하다. 동양의 신화는 보다 인간적이다.

그리스·로마신화와 동양 신화에서 등장하는 홍수 이야기만 해도 그렇다. 히브리 신화에서 등장하는 ‘노아의 방주’는 인간에 대한 신의 분노와 징벌의 성격을 띤다. 그러나 비슷한 이야기인 중국의 복희·여와 신화에는 신들 간의 다툼과 전쟁 때문에 홍수가 발생한다.

정 교수는 “신과 인간의 구별이 비교적 느슨하고 신마저도 자연의 변화를 따라야 한다는 동양 신화에서 홍수는 근본적으로 자연의 재해로 인식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신과 인간, 자연 사이에는 우월하거나 종속적인 개념이 없었던 것이다.

# 우리 신화 소재로 한 게임 등장 하길

“그동안 더게임스에 연재된 글이 독자들에게 어떻게 비춰졌을 지 참 궁금합니다. 제가 소개한 이야기들을 자료로 받아들였을 지 아니면 단순한 허구로 받아들였을 지 말이지요”

정 교수는 우리들이 오래전부터 서양의 신화에 물들어 있었기에 미리부터 염려스러워 했다. 자칫 우리 신화에 대해 독자들이 거부감이나 의구심을 갖게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였다. 하지만 이번 연재를 통해 우리 신화에 대해 개롭게 알게 되고 우리 조상들의 상상력을 함께 공감할 수 있는 기회가 됐다고 대답하자 안심하는 눈치였다.

사실 우리 영화나 소설 뿐 아니라 가장 인기있는 온라인 게임들도 우리 것이 아닌 서양을 모델로 한 중세, 판타지를 무대로 하고 있다는 것도 안타까운 일이다.

정 교수는 우리에게도 서양 못지 않은 훌륭한 소재의 신들이 있고 다양한 상상력이 존재하고 있다며 이를 소재로 한 온라인 게임이 만들어진다면 대 환영이며 도움이 필요하다면 조언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했다. 우리 청소년들이 우리의 신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게임을 즐긴다 것은 상상만으로도 흐믓한 일이었다.

정 교수는 이번 연재를 마치면서 남은 아쉬움을 다음 기회로 돌리며 더게임스 뿐만 아니라 게이머들과 다시 만날 것을 약속했다. 

1979년 서울대 중문과 졸업

1981년 서울대 중문과 석사

1988년 서울대 중문과 박사

1988-1989년 하버드 옌칭연구소

2002-2003년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

1984년-현재 이화여대 중문과 교수

저서: ‘산해경역주(1985)’, ‘불사의 신화와 사상(1994, 한국출판문화상 저작상 수상)’, ‘동양적인 것의 슬픔(1996)’, ‘도교와 문학 그리고 상상력(2000)’, ‘이야기 동양신화 1,2(2004)’ 외 다수

<취재부장 bekim@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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