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22주년-성장의 조건22]기술분야-통신·방송 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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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시대, 제국주의 시대, 그리고 가까이는 1, 2차 세계대전에서 나타났던 패권주의적 경쟁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다름 아닌 IT분야의 주도권 경쟁이다.

 기술의 발달로 각 산업영역이 급속히 융합되면서 IT산업계는 사활을 건 주도권 경쟁을 피할 수 없게 됐다.

 물론 이 경쟁은 20세기 일부 국가가 강권을 앞세워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전세계를 전쟁의 공포로 몰아넣었던 것과는 다르다.

 IT패권주의는 아주 자연스럽고, 조용하게 그렇지만 큰 소용돌이로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다. ‘매스 커뮤니케이션’ ‘매스 미디어’의 큰 축인 통신시장은 1876년 그레이엄 벨이 최초로 전화를 발명한 이후 130여년간 전세계를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하는 데 주력해 왔다.

 구리선을 바탕으로 한 음성전화가 해저케이블을 타고 태평양과 대서양을 건넌 이후, 데이터 서비스가 가능한 ISDN과 초고속인터넷 xDSL 등으로 발전하면서 광네트워크 시대로 접어들었다. 지구촌을 실시간 동시대권으로 만든 무선통신기술은 초당 3∼4Mb급의 음성과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전송할 수 있는 3세대(G) IMT2000 기술수준으로까지 발전해 상용화됐다.

 또다른 축인 지상파, 케이블, 위성 등을 매개체로 한 방송은 전세계의 기본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된 지 오래다. 남아프리카 오지 난민생활이나 미국 할리우드 배우들의 초호화판 생활이 모두 하나의 수상기 속에서 공존한다.

 그러나 21세기 들어서면서 이 커뮤니케이션의 영역들이 더는 홀로 설 수 없게 됐다. 전 산업분야에 걸쳐 ‘디지털 컨버전스(Digital Convergence)’가 시작되면서 먹고 먹히는 경쟁의 대상이 된 것. 이 같은 충돌 영역에서 누가 선점할 것인가를 놓고 기업 간 각축전도 치열하다.

 ‘유무선 통합’ ‘방송·통신 융합’ ‘유비쿼터스 광대역통합망(BcN)’은 컨버전스라는 시대적 흐름을 반영하며 IT패권주의를 가속화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가시화된 ‘컨버전스’=컨버전스는 소비자가 사용하는 모든 기기와 서비스가 네트워크로 연결된다는 데에서 출발한다.

 PC나 휴대폰·PDA· TV 등은 타 기기와 연결됨에 따라 더는 단일 기기가 아닌 정보화를 선도하는 정보기기 터미널로서 위치를 확고히 하기 위해 다투고 있는 형국이다.

 산업군의 영역도 달라지고 있다. 이미 HP나 델 같은 대표적인 IT기업들은 디지털TV 시장 진출을 선언하고 구체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IT와 가전의 영역은 이미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가장 먼저 다가온 ‘영역파괴’ 중 하나가 바로 ‘컨버전스폰’이다. 휴대폰은 가지고 다니는 ‘전화’로 시작했지만 이제는 문자메시지 송수신, 인터넷 접속을 통한 주문형비디오(VOD) 시청, 그리고 TV수신까지 가능한 제품도 이미 나왔다.

 삼성전자, LG전자 등이 내놓은 ‘위성·지상파DMB’ 단말기가 바로 그것이다. 걸어다니면서, 차량으로 이동중에 전화도 받고 TV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실내 유선전화와 이동전화를 결합한 ‘원폰’도 등장했다. 하나의 단말기로 실내에서는 저렴한 유선전화를 사용하고 외출시에는 이동전화로 사용할 수 있어 편리하다. 무선랜과 이동전화를 결합한 ‘네스팟 스윙폰’은 대용량의 데이터 서비스와 인터넷 접속도 값싸게 이용할 수 있다. 이는 2006년 상용화 예정인 2.3GHz 휴대인터넷(WiBro·와이브로)를 통해 본격화할 것으로 보인다.

 ‘홈네트워크’로 대변되는 TV와 PC의 결합은 이미 대세다. PC에 TV수신카드를 장착하면 모니터를 통해 자연스럽게 방송을 볼 수 있다. 또 TV튜너가 내장된 모니터를 사용하면 굳이 PC에 전원을 넣지 않아도 방송수신이 가능하다. 반대로 디지털TV는 TV수상기로 PC의 상당한 역할을 한다. 인터넷 접속이나 t커머스, t뱅킹 등이 가능하기 때문에 PC사용이 익숙치 않은 주부나 노인, 어린이 등도 리모컨만으로 손쉽게 이용한다.

 이 때문에 홈네트워크 시장에서 ‘누가 홈서버가 되느냐’의 문제는 ‘모든 기기의 제어를 담당하느냐’로 연결되기 때문에 각 진영의 기술 개발과 마케팅 전쟁은 치열할 수밖에 없다.

 디지털 패권다툼은 방송시장에도 이미 가시화됐다. 케이블방송사업자들이 HFC망을 통해 초고속인터넷서비스를 제공하고 SK텔레콤이 티유미디어라는 별도법인을 설립해 휴대폰으로 위성방송까지 제공할 수 있는 위성DMB를 준비중이다. KT와 하나로텔레콤은 초고속인터넷망을 통한 멀티캐스팅 서비스 ‘IPTV’를 상용화하기 위한 준비에 돌입했다. 호주 텔스트라 등 해외 업체들도 이 같은 통·방 융합서비스 제공에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성장의 포인트 ‘컨버전스’=전세계 IT기업들이 컨버전스 시장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생존을 위한 패권경쟁뿐만 아니라 정체된 시장을 뚫고 나갈 성장의 포인트이기 때문이다. 음성·초고속인터넷의 시장포화를 뚫고 컨버전스뿐만 아니라 이동통신시장의 새 부가수익원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방·통 융합의 선두주자로 꼽히는 위성DMB의 경우 국내 시장에서만도 2010년까지 약 798만명의 가입자를 확보해 시장규모는 약 1조2000억원에 달할 것으로 분석됐다. 표참조

 위성DMB 준비사업자인 티유미디어는 이를 이동통신서비스와 결합해 이동중에서도 방송을 수신하는 형태의 서비스를 준비중이다.

 유무선 결합의 킬러앱으로 예상되는 휴대인터넷도 상용화 6년차에는 가입자 945만명, 시장규모가 3조2000억∼3조7000억원 규모로 예상돼 낙관적인 시장전망을 낳고 있다. 일각에서는 여기에 이동통신과 DMB 등의 서비스가 결합하면서 시장규모는 더 늘어날 것이라는 전망이다.

 통신과 방송, 인터넷망을 광 기반 네트워크로 통합하는 BcN은 2010년까지 약 67조원의 민간투자를 유발하는 디지털 컨버전스의 최고봉으로 손꼽힌다. 전달망-가입자망-제어망을 하나로 묶어 광 백본망뿐만 아니라 HFC, FTTC, FTTH, xDSL 등 모든 종류의 망을 융합한다. 이는 결국 모든 서비스의 융합으로 발전한다. 방송과 전화, 인터넷이 모두 하나의 망에서 구현되고 전화기와 휴대폰·TV·방송셋톱박스·PC 등이 하나의 단말기로 변모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 같은 대규모 융합은 2010년에 관련 장비 및 서비스 생산액 95조원, 135억달러의 수출과 37만명의 고용효과를 창출할 것이라는 게 우리 정부의 예측이다. 또 BcN망을 기반으로 한 유무선 가입자 수도 2000만명으로 늘어날 것이라는 기대다.

 구체적인 시장전망치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IPTV, 지상파DMB 등 역시 방송과 통신, 인터넷을 융합하는 새로운 성장동력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IT패권을 선점하라=이처럼 현재 가시화된 ‘디지털 융합’은 시작일 뿐이다. 결국 모든 디지털 기기와 그 주체들은 ‘0’과 ‘1’로 구성된 공통된 특성을 바탕으로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면서 먹고 먹히는 헤게모니 싸움으로 발전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이용경 KT사장은 지난 7일 열린 ‘부산ITU텔레콤 아시아 2004’ 포럼 기조발제에서 “유비쿼터스 시대를 향한 본격적인 경쟁이 시작됐다”면서 “유선과 무선의 통합, 방송과 통신의 융합을 통해 언제·어디서나·누구나 동시에 인터넷에 접속하는 유비쿼터스 시장을 선점해 100년 후의 KT를 대비하겠다”고 말했다.

 션 말로니 인텔 부사장은 “누가 더 손쉽고 싸게 컨버전스된 기술로 유비쿼터스를 실현할 수 있는지가 성패를 가를 것”이라면서 “개방화와 표준화된 기술이 그 해답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규제완화가 성장의 필수조건

 유선과 무선, 통신과 방송, 그리고 광대역통합망(BcN) 구축을 가속화해 새로운 성장의 동력으로 삼고 소비자에게 실질적인 서비스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영역 간 월경을 제한한 ‘규제 완화’가 필수적이다.

 현재 통신과 방송은 각각의 역무로 나뉘어진 데다, 관련 법규도 전기통신사업법과 방송법 등으로 구분돼 있다. 규제기구 역시 정보통신부와 통신위원회, 문화관광부와 방송위원회 등으로 분리돼 있다. 이 때문에 통·방 융합 서비스을 개발하더라도 관련 규정이 없거나 이중규제를 받아 사실상 서비스가 불가능해질 경우도 많다. 결국 관련 법규 손질에 수년간의 시간을 투입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위성DMB. 올해 초 방송법 개정으로 구사일생 서비스가 가능해졌지만 관련 시행령 개정이 늦어지면서 7월로 예상됐던 상용서비스가 연말께로 늦춰졌다. 논란의 핵심은 DMB서비스를 방송으로 볼 것인지, 통신으로 볼 것인지를 놓고 규제기관 간 의견을 모으고 관련 법을 개정하는 데만 수년이 걸렸다. 또 방송영역으로 합의가 모아진 이후에도 대기업 겸영규제와 사업자의 공공성 문제, 채널수와 지상파 재송신 등의 현안이 터지면서 시간이 차일피일 미뤄졌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통·방 융합 등 컨버전스 서비스의 조기 상용화를 위해 이를 규제하는 별도의 법령이나 전문규제기관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정보통신정책연구원(KISDI)의 김원식·한은영·임동민 연구원은 최근 유럽 주요국의 통·방 융합 대응사례 분석을 통해 △융합서비스만을 대상으로 하는 통·방 융합서비스법 제정이 바람직하고 △효율적 통합을 위해 통신과 방송 모두에 정통한 전문인력의 양성이 시급하며 △통합 여부에 상관없이 네트워크 규제기관의 독립성 보장이 필요하다는 보고서를 내놓았다.

 보고서에 따르면 현재 영국, 독일, 프랑스 3국은 통·방 융합에 따라 법령과 규제기관 정비를 추진하였거나 추진중이라는 점에서 공통적 행보를 보이고 있다. 반면 통신과 방송 통합 정책부서에 대해서는 아직 시기상조라는 지적이다.

 ‘통·방 융합서비스법’과 ‘통·방 융합위원회’ 등의 논의가 진행중인 우리나라의 경우, 현 규제체계를 유지한 상태에서 향후 법령정비 후 장기적 통합으로 전환할 수도 있다고 전망했다. 결국 출현이 임박한 융합서비스에 대해서는 우선적으로 법적기반을 마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설명이다.

 이외에도 보고서는 이 같은 법령 및 규제기구 정비를 위해서는 관련 기구들의 추진의지가 높고 상호 의견교환 과정에서 긴밀한 협력으로 갈등을 해소하고 합의를 도출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이외에도 통합여부를 차치하고서라도 네트워크 규제기관의 독립성 보장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한은영 연구원은 “효율적 통합을 위해서 통신과 방송 양 부문에 모두 정통한 전문가 양성이 필요하다”면서 “이를 바탕으로 보다 효과적인 규제 방향을 설정하고 합의를 도출해 새로운 서비스를 현실화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정지연기자@전자신문, jyju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