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수 실종…무너지는 전자상가](2)믿는 것은 `현찰`

사진; 각 매장마다 가격할인 광고판이 어지럽게 붙어 있지만 정작 찾는 사람이 없어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내일의 1000원보다 오늘의 900원이 낫다.”

 “어음을 받느니 차라리 일반 신용으로 물건을 공급하겠다.”

 어음은 받아 봐야 요즘 같이 어려운 시기에 할인하기도 쉽지 않은 데다 사고 나기로 말하자면 어음이 신용보다 더 위험하다는 게 유통업계의 한결 같은 지적이다. 불황이 장기화되면서 자금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 피해를 본 업체들이 잇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용산 전자상가에서 만난 한 주변기기 수입 유통업체 사장은 요즘 상가에 “현금이 마르고 있다”고 전했다. 환율인상에 따라 결제해야 할 금액은 커진 반면 매출과 이익은 줄어든 게 직접적인 이유란다. 사실 웬만큼 규모가 있는 수입 유통업체들은 IMF체제를 겪으며 환율 변동에 대비하는 능력을 키우기는 했지만 중소기업 수준에 불과한 수입 유통업체들은 아직도 ‘유전스(usance : 기한부 어음 발행을 조건으로 하는 LC)’ 거래를 하며 보통 30∼90일 후 결제를 하고 있다. 따라서 올 2, 3월에 수입한 물건의 경우 오른 환율로의 결제가 불가피해졌다. 가뜩이나 매출부진에 수익률 저하로 고민에 빠진 유통업체들은 환율인상에 따른 환차손을 어쩌지 못하고 전전긍긍하고만 있다.

 돈깨나 있다는 이른 바 ‘나까마’로 불리는 수입 유통상마저 돈줄이 말라가고 있다. 일반 소비자들은 경기침체가 계속되면서 없는 이들은 없어서 못쓰고 있는 이들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지갑을 닫고 있는 모습이다.

 상황이 이쯤 되자 전자상가의 유통업체들은 현금 확보에 비상이 걸렸다. 현금을 많이 빨리 확보하고 외상거래를 안전하게 하는 데 여념이 없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좀 더 싸게 판매하더라도 현금 거래를 하는 것. 부품 유통업체인 A사는 거래 업체들로부터 ‘콧대 높다’라는 소리를 종종 듣는다. 물건 공급에 따른 담보를 제공하든지 아니면 현찰 거래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주기판 유통업체인 B사는 ‘수금할인’을 당근으로 내걸었다. 이 회사는 거래업체들로부터 통상 15∼30일 안에 수금을 하고 있으나 이보다 빨리 결제해 주면 일종의 수금 리베이트를 주고 있다. 또 다른 유통업체 C사는 아예 금융권을 이용하고 있다. 거래 업체들로 하여금 신용보증기금을 이용하도록 하고 신보에서 보증하는 한도 내에서만 여신을 주는 것이다.

 유통업체들이 이처럼 현금 확보에 주력하다 보니 여신 관행에도 변화가 일고 있다. 주기판 유통업체인 B사는 최근 총판 업체들에 대한 거래한도를 서서히 줄여나가기 시작했다. 그동안 월 평균 월 2억원어치를 신용으로 공급해 줬지만 앞으로 1억원 선으로 한도를 줄일 계획이다. 그 대신 B사는 부진한 매출을 만회하기 위해 거래 업체수를 늘리기로 했다. B사가 이 같은 방법을 선택한 것은 지난 1분기에 하위 거래업체의 부도·폐업 등으로 인해 중간 도매상들이 피해를 본 사고가 끊이지 않았는 데다 내수 경기가 더 어려워질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한 주변기기 업체에서 10여년째 영업을 담당하고 있는 K이사는 “예전에는 소수 정예 업체들에 여신을 집중적으로 주고 이들을 통해 매출을 극대화하는 방법을 썼지만 올 들어 나타나기 시작한 경향은 사고가 터지더라도 가랑비 맞는 수준으로 끝내자는 계산에서 여신을 분산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증권가에서는 이미 정설로 굳어진 이야기이지만 ‘계란을 한 그릇에 담지 말라’라는 속담이 이제 전자 유통업계에도 본격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박영하기자 yhpark@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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