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IETF 서울회의`에 가보니]한국 제안 `DNA`에 큰 관심

인터넷 기술 세계표준을 만드는데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IETF 59차 회의가 3일째 열리고 있는 2일 오전 11시. 회의장인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2층 로비에 들어서자 융단이 깔린 바닥에 아무렇게나 주저않은 사람이 부지기수다. 넥타이는 커녕, 양복이라고 걸친 사람은 오직 기자와 호텔 직원뿐. 대부분 청바지·티셔츠 차림에 어깨까지 내려온 머리를 묶어맨 남자도 여럿이다. 자유롭기 이를데 없는 이 군상은 대부분 시스코나 루슨트, 알카텔 등의 엔지니어나 캠브리지, 버클리, UCLA의 교수들이라고 한다. 하나같이 노트북 컴퓨터를 펴놓고 무엇인가에 열중해 있다.

"발표한 드래프트에 대해 이메일로 토론 의견을 올리는 겁니다" 기자를 안내한 김대영 충남대 교수의 설명이다.

IETF에 RFC(표준)를 채택시켜 인터넷 기술표준을 만들기 위해선 드래프트(초안·Draft)를 등록해야 한다. 드래프트는 개인의 이름으로 자유롭게 제출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이메일로 넘어오는 수많은 반대의견을 넘어서야 한다.

아예 코멘트를 받지 못하는 썰렁한 대응도 숱하다. 워킹그룹 의장에게 인정받아 실제 회의장소에서 발표할 기회를 얻는다 해도 그 자리에서 된통 당하거나 또 다시 쏟아지는 이메일 반대의견에 대응해야 한다.

 “발표가 끝나면 마이크 앞에 줄을 서서 질문들을 해댑니다. 비영어권 국가출신이 어설픈 발표를 하면 알아듣기 어려운 본토영어로 기를 죽이곤 하죠.” 국가의 대표들이 모여 외교적 예절을 차리고 발언권을 존중하는 ITU(국제전기통신연합) 회의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인터넷 초창기 멤버들인 UCLA, MIT, 버클리대 교수들의 사사를 받은 2세대 진영이 지금 IETF의 ‘이너서클’이다.

마침 들른 한 워킹그룹 회의장에선 프리젠테이션을 막 마무리지은 발표자가 노트북을 펴고 앉은 수백명의 청중 앞에서 답변에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가 IETF에 발을 들이기는 ITU 등 다른 표준기구보다 훨씬 힘든 것이 사실이다. 지금까지 3500여개의 RFC중 우리 기술은 고작 2건.

그러나 산업계의 이해를 철저히 반영하는 다른 표준기구에 비해 학계 위주의 아카데믹한 분위기가 강한 게 IETF의 특징이다. 돌파구를 찾아볼 수 있는 대목이다. 헤럴드 알베스트런드 IETF의장은 “우리는 가장 좋은 인터넷을 위해 다양한 의견을 듣는 것을 최고의 목적으로 한다”며 “특히 한국과 같이 목소리를 많이 내지 못했던 국가로부터도 다양한 시각을 볼 수 있다는 점을 크게 평가한다”고 말했다. 이번 IETF에서는 특히 우리가 제안한 DNA (Detecting Network Attachment) 분야의 새로운 워킹그룹이 첫 회의를 가졌다. 최진혁 삼성종합기술원 연구원이 모바일IP분야의 핸드오프 표준 필요성을 제안해 만들어진 것. 우리로서는 첫 번째 사례다. 300여명이 뜨거운 관심을 보인 가운데 첫 회의를 마치고 상기된 표정의 최 연구원은 “IETF는 몇몇 친밀한 엔지니어들의 이너서클로 움직인다”며 “DNA분야는 처음 논의에 참여하면서 이너서클에 포함된 첫 번째 성과”라고 말했다. 예전보다 많은 약 30여건의 드래프트와 10여건의 발표가 예정된 이번 회의는 우리가 인터넷 소비강국에서 인터넷 기술강국으로 떠오르는 시금석이 될 전망이다.

*인터뷰: 헤럴드 알베스트런드 의장

“한국과 같이 지금까지 목소리를 내지 못한 국가들이 IETF에서 다양한 시각을 제시하는 것은 아주 반가운 일입니다.”

헤럴드 알베스트런드 IETF의장(44)은 “한국의 브로드밴드 성공사례는 잘 알고 있다”며 IETF에서의 한국의 역할을 기대했다. 그러면서도 “스팸메일의 경유지, 원산지라는 오명이 부정적 이미지를 갖는 만큼 이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라고 일침을 놓았다. IETF는 인터넷 표준기구로 떠오른 가운데 ITU로 대표되는 전통적인 통신 분야와의 협력관계를 물었다. “협력을 시도했지만 ITU가 준강제조항(규제) 중심이라면 IETF는 오직 기술중심의 논의를 한다는 차이점이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서로 결과물을 인용·교류하는 형태의 협력이 무난하리라고 봅니다.”

 IETF가 기업의 이해관계에 따른 영향을 받지 않느냐는 질문에 대해 그는 “최고의 기술을 위해 최대한 공개토론을 벌인다”며 “특히 중립적 의견을 많이 가진 학계가 중심을 잡고 중재하는 경우가 많다”고 답했다. IETF가 ‘정치적’이기 보다 ‘학술적(아카데믹)’이어서 대응하기에 따라 우리에게는 큰 벽이 될 수도, 돌파구를 마련할 수도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김용석기자 yskim@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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