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의 기를 살리자](2)악화되는 기업환경

 중계기 전문업체인 A사 직원들은 최근 극심한 허탈감에 빠져 있다. 지난 2001년부터 준비해 온 WCDMA 중계기 사업의 성과가 언제 나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당시 정부와 통신사업자의 투자계획만 믿고 WCDMA 중계기 개발에 연매출액의 10% 가량을 투입했으나 지난해 돌아온 것은 사실상 없었다. 사업초점을 맞췄던 SK텔레콤의 WCDMA투자가 거의 없었던 게 직격탄이었다. 더 안타까운 건 이제와서는 정부도, 통신사업자도 책임을 지지 않고 있고, 아직도 향후 투자 계획이 모호하다는 점. 그래서 할 수 없이 올해는 아예 WCDMA 중계기 매출을 사업목표에서 빼버렸으나 그동안 준비한게 아까워서 직원들도 모두 허탈해하고 있다. 이는 비단 중계기 업종뿐만 아니라 정부 정책과 대기업에 의존하는 중소기업들은 모두 공감하는 일이다. 몇개월씩 투자해왔던 프로젝트가 하루 아침에 갑자기 사라졌을 때 삼성전자나 LG전자 같은 대기업들은 어느 정도 버틸 여력이 있지만 중소기업들은 그 자체로 사기가 바닥에 떨어지는 사례를 흔히 목격할 수 있다.

 ◇정치사건에 단골로 휘말리는 기업=기업의 사기를 저하시키는 것에는 많은 요인들이 있지만 국내에서는 정치적 문제를 빼놓을 수 없다. 대선자금 시비로 시작된 수사가 기업 총수들의 구속까지 이어지고 수사도 장기화하면서 기업들이 온통 ‘여론 재판대’에 올라 지탄의 대상이 됐다.

 상황이 이쯤되니 기업들은 아무런 보호장치 없이 정치권이나 검찰에 의해 휘둘리고 있다는 분위기가 팽배해졌다. 기업에 대한 이미지가 실추되고 여론의 질타를 받으면서 기업에 소속돼 있는 샐러리맨들도 위축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 기업 내부에서는 거액의 정치자금을 제공한 것은 분명 문제지만 “초가삼간 태우는 일은 그렇다 치더라도 정작 빈대는 못 잡을 수도 있다”며 정치권의 문제가 기업의 문제로 비화되는 점을 경계하고 있다.

 최근 국회에서 있었던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 비준 연기문제는 정치적 논리로 산업계가 피해를 보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다. 농업경쟁력 측면에서는 연기해야 마땅하지만 전체 국익 차원에서 보면 한시가 급하다는 게 대세다.

 ◇신속하지 못한 산업정책=디지털TV 전송방식에 대한 지리한 논쟁은 산업정책을 조기에 결정하지 못해 실기한 좋은 본보기다.

 디지털TV는 LG전자가 지난해 8월 세계 최대 크기인 76인치 PDP TV를 내놓은데 이어 삼성전자가 지난주 개막된 라스베이거스 CES에서 80인치 제품을 내놓는 등 국내 업체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세계 시장을 선도하고 있는 품목이다. 삼성전자는 디지털TV를 오는 2005년까지 세계 시장 점유율 20%로 높여 1위를 달성하고 2007년에는 25%의 점유율을 달성한다는 중장기 계획을 갖고 있다.

 이처럼 기업들은 디지털TV를 차세대 전자산업의 캐시카우로 보고 역량을 집중할 계획을 세우고 있지만 방송방식 논쟁이 장기화되면서 내수 확산은 더뎌질 수 밖에 없게 됐다. 방식이 뒤집어지기라도 한다면 산업계는 12조원의 손실을 입을 판이다. 게다가 디지털방송의 광역시 확대 일정마저 연기돼 바야흐로 개화기를 맞이한 디지털TV 수요는 아직 본궤도에 오르지 못하고 있다.

 김쌍수 LG전자 부회장은 최근 CES 행사장에서 “정부가 디지털TV방식을 조기에 확정하지 않을 경우 연관 산업이 무너지며 경쟁력은 2년 이상 퇴보하고 성장 모멘텀을 잃을 것”이라고 우려를 나타냈다.

 제도 또는 법규의 경직성도 기업의 사기를 저하시키는 데 한몫 한다. 삼성전자가 차세대 캐시카우 역할을 할 반도체 산업육성을 위해 화성공장을 증설 허가를 받아내는 데 걸린 시간이 얼마인가. 삼성전자의 한 관계자는 “증설은 허용됐지만 국가균형발전특별법에 막혀 무려 10개월이나 투자시기가 지연돼 올해 투자계획도 전면 수정할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사회적 불안도 한몫=지난해 국내 기업들은 유례없는 난관을 겪었다. 5월과 8월 두차례에 걸친 화물연대 파업은 전국적인 물류대란을 초래했고 급기야 수출에도 막대한 차질을 빚었다. 뿐만 아니다. 철도노조 파업을 비롯해 조흥은행 등 대형 사업장에서 잇따라 분규가 터지며 노무현 정부의 ‘친노 정책’에 대한 비판도 일었다. 이처럼 사회적으로 불안한 요소들도 ‘기업하기 어려운’ 여건이 되고 있다.

 한국개발연구원이 최근 조사한 ‘정규직 노동자의 보호수준에 관한 국제비교’ 결과를 보면 한국은 OECD국가들 가운데 노동자의 정리해고가 6번째로 힘든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그만큼 한국에서 기업을 경영하기가 까다롭다는 것을 의미한다.

 환경이 이렇다 보니 점차 기업들은 값싼 노동력을 찾아 해외로 이전하고 국내에 들어와 있던 외국 투자기업들도 이제는 투자를 미루고 있다.

 “한국은 중국 등 주변국에 비해 산업규제·노사문제·토지가격 등 어느것 하나 비교우위를 가진 것이 없다”는 대한상의 이현석 상무의 지적은 그래서 그 울림이 유난히 크게 느껴지는 것이다.

 

 ◆ `친기업환경` 만들자

 올해 삼성전자와 LG전자의 CEO들은 올해 신년사를 통해 올해를 초일류기업 및 ‘글로벌 톱3’ 진입을 위한 기반 다지기의 해로 설정했다

 이건희 삼성회장은 신년사를 통해 새해 경영방침을 ‘글로벌 일류기업’으로 정하고 세계 시장을 리드하는 1등 제품 확대와 현지 중심의 1등 전략을 추진한다는 것을 목표로 내세웠다. LG그룹 역시 경영의 최우선 과제를 ‘글로벌 경쟁력 확대’에 두고 현재의 주력사업과 미래 승부사업 분야를 주도하기 위해 ‘선행투자’를 과감하게 추진해 나가기로 했다.

 현대자동차그룹은 오는 2010년 500만대 생산 체제 구축을 목표로 올해를 ‘글로벌 톱5’ 도약의 토대를 다지는 해로 선언, 공격적인 영업을 펼칠 계획이다.

 이처럼 새해들어 기업들은 지난해까지의 부진과 영욕을 벗어던지고 새출발을 다짐하고 있다. 경기가 바닥을 찍고 상승할 것이란 기대감에 대기업은 물론 중소기업들도 새롭게 희망을 다지고 있다. 이런 때에 정부가, 사회가, 또 기업 스스로가 기업에 기(氣)를 불어넣어줘야 한다.

 방일석 올림푸스한국 사장은 올림푸스 영상시스템 부문 아시아태평양 총괄 사장에 선임되면서 아태 본부의 설립을 준비하고 있다. 아태 본부 거점으로 현재 올림푸스 아태지역의 물류거점 역할을 하고 있는 싱가포르을 비롯, 홍콩과 서울도 후보지로 검토됐으나 홍콩이 아태 본부로 선정됐다. 그 이유는 소득세·법인세율이 홍콩에 비해 상당히 높아 비용 면에서 경쟁이 안됐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방사장은 “더 이상 한국기업이 한국시장 만을 타깃으로 활동한다거나 외국기업이 국내시장을 잠식하고 수익을 해외로 유출한다는 인식이 통하지 않는 이 때, 우리나라가 글로벌화의 중심에서 세계와 함께 호흡하고 경쟁하기 위해서는 이를 뒷받침 할 만한 오픈 마인드와 시스템이 구축돼야 한다”며 “외국기업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경제, 우리기업들이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을 갖고 활동하기 위해 외국기업들의 한국투자가 보다 활발히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정부의 세금감면 혜택이나 시설 지원, 수입에 대한 관세혜택 등 여러 분야에서 외국기업으로 하여금 국내에 투자하게끔 만들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환경이 갖춰줘야 하며, 정부의 강력한 의지와 발빠른 행보가 조속히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보다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경쟁국들에게 좋은 기회를 빼앗기게 될 지 모른다”고 우려했다.

 <박영하기자 yhpark@etnews.co.kr>

◆ 인터뷰 - 이승철 전경련 상무

 “외국에서는 그 나라 대표기업(내셔날챔피언)을 키우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는 반면 우리는 대표기업에 대한 각종 규제로 평준화를 유도하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이승철 전경련 상무는 이제 한국도 대표기업에 대한 규제보다는 육성에 초점을 맞춘 정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소득 2만달러 시대 진입을 위해서는 세계 초일류기업이 많이 탄생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현상은 발목을 잡는 각종 규제들로 기업들의 의욕을 꺾기 일쑤지요.”

 이 상무는 올들어 정부가 앞장서 분위기를 만들고 있는 ‘기업 기(氣)살리기’야 말로 침체된 한국경제에 대한 정확한 원인분석의 결과라고 평가한다. 단기적 부양을 위한 ‘비아그라’가 아니라 치밀한 계획에 따라 중장기적으로 치료하는 ‘체질 개선제’가 필요하다는 판단이 그 근거다.

 “참여정부는 기업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뒤돌아보면 정책이 뒷받침하지는 못했지요. 기업하기 좋은 환경의 핵심적인 요소는 거시적으로는 기업심리회복, 정책불안 제거이고 미시적으로는 규제완화, 생산비용절감, 노사관계 안정 소비심리회복 등입니다. 하지만 구체적인 정책은 별로 없었고 주로 재정확대, 조세감면 등에 치중한 측면이 강합니다.”

 이 때문에 이 상무는 올해 정부의 기업 기살리기는 수요부양정책보다는 공급부양정책에 초점이 맞춰질 것을 기대하고 있다.

 “과거에는 정치적 일정 때문에 지나치게 단기적 정책에 매달려 많은 오류를 범했습니다. 이제는 장기적으로 부작용이 적은 공급측면의 부양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 상무는 현재의 기업경영에 있어 가장 큰 문제점으로 기업심리가 위축돼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과거 성장을 주도했던 ‘일등공신’은 과감한 투자와 공격적 경영인데 외환위기이후 기업경영에서 찾아보기 힘들어졌습니다. 전문경영인체제를 강조하다보니 경영자의 단기 성과 때문에 장기적인 기업성장을 등한시하게 됐습니다. 또 부채비율 200% 규제 등으로 아무리 좋은 비전을 가진 사업이라도 과감한 투자가 어려운 환경이 되고 말았습니다.”

 1만달러 시대와 2만달러 시대의 정책 등은 서로 다를 수 밖에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따라서 우리도 이제 1만달러에서 2만달러를 향해 달리는 우리 상황에 잘 맞는 기업정책이 무엇인지를 심각하게 재검토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정권교체기마다 반복되는 정치자금 문제는 브랜드가 곧 경쟁력인 글로벌시대에 치명적인 국가적 손실이 되고 있습니다. 기업과 기업인이 정치자금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나가는 것도 기업문화를 한단계 업그레이드하기 위한 과제 중에 하나겠지요.”

 <심규호기자 khsim@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