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많은 편견들이 사회에서 사라졌지만 여전히 우리나라는 학벌·남성우월주의가 강하게 남아 있다. 신문에서는 심심치않게 ‘xx고, xx대, xx과 출신 부상’ 등의 기사가 보이고 있다.
지난 11월 교육부의 의뢰를 받아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 10명 가운데 7명은 학벌로 인해 심리적 박탈감을 느끼고 있고, 6명은 성공·출세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로 학벌을 꼽았다. 또 이른바 명문대 출신이 아니어서 겪는 가장 큰 불이익으로는 ‘취업 과정에서의 차별’을 들었다. 64.8%는 기업체 직원 채용에서 학벌이 결정적 요인이라고 응답했으며, ‘학벌의 상속으로 계층간 불평등이 심화된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찬성(49.6%)이 반대(22.9%)보다 배 이상 많았다.
특히 사회에서 큰 성공을 거둔 CEO라 할지라도 학벌 때문에 콤플렉스를 느끼고 있는 CEO들이 적지 않다. 조선시대에 매겨진 사농공상이 현재에도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셈이다.
여성에 대한 편견도 여전하다. 코스닥등록법인협의회가 발간한 2003년 코스닥기업 경영 인명록에 따르면 849개 코스닥등록기업 최고경영자(CEO) 가운데 여성 CEO는 1.3%인 총 11명에 그쳤다. IMF 이후 수많은 벤처 기업들이 탄생했지만 여전히 주류는 남성이고 대기업 역시 임원 대부분이 남성이다. HP의 칼리피오리나, 루슨트테크놀로지스의 패트리샤 루소, 제록스의 앤멀케이 회장 등이 CEO로서 다른 남성 CEO 못지 않게 인정을 받는 것과는 한참 거리가 있다.
국내에서 이러한 편견을 이겨내는 것은 남보다 2∼3배의 노력, 살인적인 인내심, 그리고 일에 대한 열정 등이 조화를 이룰 때에만 가능하다는 점에서 이들 CEO에 대해서는 기대 이상의 관심이 쏟아진다. 물론 이들은 이러한 시선을 거부한다.
이레전자의 정문식 사장(43)은 학벌이라는 벽을 뛰어넘은 사람이다. 집안사정 때문에 13살의 어린 나이에 생활전선에 뛰어들었고 최종 학력은 고졸이다. 경험해온 사업 아이템도 커넥터 재재하청부터 핸즈프리, 휴대폰용 충전기 등에 이르기까지 주로 발품을 많이 파는 사업들이었다. 그러던 도중 지난 2001년 LCD모니터 사업에 뛰어든 후 상승곡선을 그리기 시작해 지난해 초 PDP TV사업에 진출 계기로 새로운 도약기를 맞고 있다. 또 최근에는 인켈로 유명한 이트로닉스 인수작업을 진행해 화제를 낳기도 했다.
정 사장은 “그냥 열심히 하다보니 현재에 이르렀다”며 “학벌이라는 장벽을 느껴볼 여유를 그리 갖지 못했다”고 밝힐 정도로 일벌레로 소문이 나있다. 정 사장은 다른 LCD모니터 업체들이 어려울 당시 PDP TV 등으로 주력 제품을 전환하는 등 남다른 사업감각과 성실함이 돋보인다는 평가다.
그는 “앞으로 회사가 더욱 커질 경우 학벌이라는 장벽을 느낄지는 모르지만 많은 어려움을 극복했 듯이 이겨나갈 수 있을 것으로 믿고 있다”며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이 대접받는 사회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지난해 대박신화를 창조한 김남주 웹젠 사장(33)도 국내에서 보기 힘든 고졸 CEO 중 하나다.
그는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에 다닐때까지 그림에 푹 빠져 있었다. 한때 만화감독이 꿈이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공부하고는 거리가 멀었고 자연스럽게 대학을 포기했다. 그리고 회사에 들어가서 배운 CAD를 바탕으로 게임 그래픽에 눈을 돌리게 됐고 2000년 뮤를 탄생시킨다. 좋아하다보니 일에 몰두하게 됐고 CEO까지 올라선 경우다. 그는 “학력이 나의 결점이라고 생각한 적은 단 한번도 없다”며 “고졸이란 이력을 대졸로 바꾸기 위해 대학 진학을 할 계획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국내 백신업계의 양대산맥으로 우뚝선 하우리의 권석철 사장(33)도 명문대 직원들이 즐비한 백신업계에서 드물게 전문대 출신으로 실력을 인정받고 있는 CEO다. 특히 경쟁사의 대표가 국내 CEO 가운데 가장 존경하는 CEO로 항상 선정될 정도로 인지도가 높아 사업 초창기에는 경쟁사의 벽을 실감하는 등 어려움이 적지 않았지만 결국 제품력을 인정받음으로써 현재의 위치에 도달했다. 권 사장은 한때 개그맨에 큰 관심을 갖기도 했지만 학창시절부터 백신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꾸준히 활동을 펼치다 창업을 하게 된다.
산업용 전자통신 계측기 전문회사인 이지디지탈의 이영남 사장(47)은 여성에 대한 편견이 더욱 심했던 지난 80년대 CEO에 오른 인물이다. 그는 섬유·섬유·모피·전자제품 제조업체였던 광덕물산에 평사원으로 입사해 전자제품 사업부를 맡아 서현전자로 출범시켰다. 이후 LG정밀의 범용 계측기 사업을 인수해 사업을 더욱 확대하게 된다. 이영남 사장은 “소주 한잔이 생활의 즐거움인 공장직원들과 하나가 되기 위해 어느 남성 CEO 못지 않게 즐겨 소주를 마셨다”며 “어떤 의미에서 보면 나의 이런 사업스타일은 남성 중심의 산업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게임에 가까웠다”고 그 당시를 회고 했다.
그는 “가사와 출산·육아·시대의 관계 등을 전적으로 맡고 있는 한국사회에서 여성으로 CEO로 성공하는 것은 남성보다 몇 배나 힘들다”며 “일단 경영에 나선 이상 철저한 기업마인드를 가지고 사회적인 책임감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후배 여성 CEO에게 조언했다.
국내 게임개발업계에서 1세대 CEO로 꼽히는 소프트맥스의 정영희 사장(41)은 게임업계에 여성들의 진출을 잇게 하는 가교 역할을 했다. 정 사장은 몸담아왔던 회사가 부도가 나면서 게임업체의 경영을 맡게 됐다. 다른 1세대 게임 개발 CEO들이 벤처에 밀려 사업을 포기하거나 재기 활동을 펼치는 데 반해 정영희 사장은 여전히 게임업계의 대모이자 대부로 인정받고 있다. 최근에는 PC게임에서 탈피, 온라인 게임으로 영역을 넓혀가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편견을 이긴 프런티어들의 특성은 무엇일까. 그들은 예상 외로 자신에게 쏟아지는 편견을 느끼지 못했으며 그걸 느낄 만큼의 여유를 갖지 않았다. 어쩌면 편견은 편견 속에 묻혀사는 사람들만의 상식일지도 모른다.
<유형준기자 hjyoo@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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