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프런티어]사오정의 반란

 40대인 모 중견 제약회사의 정보시스템실장 A씨는 앞으로 직장을 계속 다녀야 할지 말아야 할지 최근 고민에 빠졌다. 빠르게 변화하는 정보기술(IT) 분야이다보니 새로운 기술이 속속 출현해 후배들앞에서 난처할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더 이상 위로 올라갈 자리도 없는 터에 후배들에게 길을 터주어야 하지 않느냐는 생각도 든다. 내심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데 사오정(45세 정년)이란 말까지 들린다. 남들은 우스개 소리라고 농을 치지만 왠지 씁쓸함을 달래기 어렵다.

 이는 더 이상 A실장만의 고민이 아니다. 최근 라이거시스템즈가 자사 직원 3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벌인 결과를 보면 잘 나타난다. IT업계의 평균 퇴직연령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48%의 응답자가 40세 이전이라고 답했고 40.2%는 45세 전후라고 응답했다. 이들 중 업계 평균 퇴직 연령이 50세 전후, 55세 이후라고 답한 사람은 각각 5.9%에 불과해 IT업계에서는 사오정, ‘삼팔선(38세에 명예퇴직 고려)’ 등 조기 퇴직바람을 몸소 체험하고 있음이 입증되는 것이다.

 최근 들어 대기업에서 40대 초반 이사들을 대거포진하며 사실상 퇴직연령대가 빨라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40대인 한 CEO는 “지금의 40∼50대는 아픔과 좌절을 많이 겪어 본 세대입니다. 요즘 젋은 세대들이 보기에는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이 많은 세대일수도 있다”고 말한다. 40년대 중반 이후부터 60년대 초에 태어난 이들 세대는 그야말로 전쟁을 직접 겪기도 했고 전쟁이 남긴 폐허위에 집을 직접 세웠던 고생만 알고 살아온 세대다. 이제 2만달러시대를 달려가는 우리나라는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낸 그들이 있기에 든든하다. 40∼50대, 반란을 꿈꾸는 그들은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 다른 영역에 처음 진입한 새내기 CEO부터 베테랑 CEO까지 ‘화려한 나날’보다는 ‘의미있는 세월’을 만들어가야겠다는 것은 공통된 희망사항이다.

 선석근 씨오피코리아 사장(43)은 지난 12월 회사를 새로 설립했다. 15년간 현대해상화재보험에서 보험업무를 담당하다 전자지불결제(PG) 업체를 창업한 것이다. 물론 이에 앞서 PG업체인 K사에서 1년 6개월동안 재무이사로 있으며 PG업에 대한 공부는 충실히 했다. ‘이쯤되면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자신이 직접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도 생겼다.

 대기업에서 15년간 보낸 세월이 현재 재무·인사관리에 도움을 준다는 선 사장은 “호텔, 골프 등 특정분야만을 대상으로 한 전문 PG업체를 만들어 전자지불업계의 확실한 비즈니스 모델을 선보일 것”이라고 각오를 다진다.

 대기업에서 잔뼈가 굵은 김현섭 스카우트 사장(45)도 새로운 영역에 뛰어들기는 마찬가지다. 김 사장은 지난 86년부터 현대종합금융에서 시작해 2003년 현대기업금융에 이르기까지 금융업무의 달인으로 통한다. 금융통인 그가 지난해 8월 웹 리쿠르팅 업계로 뛰어든 것은 ‘비슷한 처지에 있는 40-50대 세대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길을 찾아보자’는 이유였다. 스카우트가 온오프라인 사업을 동시에 벌일 수 있다는 비즈니스 모델에도 매료됐다.

 김 사장은 웹 리쿠르팅 경쟁업체들의 CEO가 주로 30대인 점을 감안하면 최고 형님뻘이다. “중장년층은 물론 청년실업까지 사회문제로 대두된 상황에서 회사수익과 더불어 사회공익을 함께 해결할 수 있는 보람있는 일입니다.” 김 사장은 휴먼리소스(HR) 전문 업체가 된다는 야부진 꿈을 하나씩 선보인다는 계획이다.

 지난 2002년 후반 최근 일본과의 무역사업을 시작한 박영진 가오리무역 사장(42)은 신체적 불리함을 극복한 경우여서 놀랄만하다. 박 사장은 지난 99년불치병인 루게릭병(근위축증측삭경화증)으로 전신마비가 돼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다. 호전되긴 했지만 지금도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다. 그럼에도 IT, CT, BT산업부문에서 대구 경북지역업체들의 해외 진출 가교 역할을 하겠다는 각오로 뛰고 있다.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무역전공하고 일본 무역상사에서 근무하기도 했습니다. 일본에 많은 인적 네트워크가 있는 만큼 신체적 불리함을 극복할 수 있죠.” 그는 현재 이렇다 할 실적은 없으나 현재 일본 대기업과 5-6개 건에 대해 논의하고 있어 올해 목표액인 50만달러 수출에는 지장 없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40대 새출발을 하는 인물 가운데는 의외의 선택을 해 주위를 놀랍게 하는 경우도 많다. 한미숙 헤리트 사장(42)이 대표적인 사례다. 14년간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에서 엔지니어로 근무하던 그가 2000년 창업했을때 주변에서 ‘왜 안정적인 직장을 떠나느냐’고 만류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는 “5년 뒤 자신의 모습에 비전이 없다고 생각해 창업하게 됐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부가통신서비스 솔루션 전문업체인 헤리트는 지난해부터 본격적인 사업이 전개되고 있다. 지난해 매출 60억원. 올해는 차세대 네트워크의 초기 투자단계로 2배 이상 매출 성장이 기대된다.

 “정보화 사회에서 요구하는 인재형으로 변모해야할 듯합니다. 경험, 관리도 중요하지만 창의,혁신, 도전이 중요하다는 얘기죠.” 그는 40∼50대가 퇴출자라는 칙칙한 이미지가 아니라 새로운 변신을 통해 인생을 즐기는 아름다운 세대로 표현되는 날이 올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이석주 이납 사장(52)도 일부 기업에서 정보화담당임원(CIO) 영입 유혹을 뿌리치고 2001년 창업을 했다. 미국 연구소 생활을 하다 지난 92년 삼성SDS컨설팅 팀장을 시작으로 CJ시스템즈 e비즈니스 사업본부장 및 개발본부장까지 역임한 베테랑 개발자다.

 “만들고 싶은 시스템을 직접 개발하고 싶었죠. 한국형 SI를 이루고 싶은 욕심도 한 몫 했습니다.” 그가 CJ시스템즈를 떠났을 때만 해도 여러 기업의 오퍼가 있었으나 끝내 거절했다. 기술전문가를 우대하는 기업이 없어 회사를 그만두면 다른 일을 해야 하는 현실을 이겨보겠다는 것이었다. “회사가 커지면 각종 기술 전문가들이 자유롭게 연구하고 일 할수 있는 환경을 제공할 겁니다.” 그는 국가주도의 산업시대는 지났고 개인별 전문성이 증대하는 지식시대에 들어온 만큼 지금부터라도 기술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자신의 업종별 경험을 살린다면 더 많은 기회가 올 것이라고 40∼50대의 희망을 얘기했다.

 40∼50대 새내기 CEO에게 ‘희망’을 발견한다면 능수능란한 베테랑 CEO에게는 ‘안정감’을 느낄수 있다. 신현정 유니게이트 사장(53)은 지난 97년 2월 저장장치 업체 업계에 뛰어들었으니 벌써 8년차다. 이에 앞서 IBM 8년, 데이터게이트 9년을 보냈으니 IT업계 경력만 해도 25년이다.

“신뢰를 갖고 할 수 있는 찾아보다 창업을 하게 됐습니다.” 데이터게이트에서 영업 담당 상무로 근무하다 국내에 대형스토리지 시장이 다가올 것이란 전망속에 만든 회사다.

 97년 IMF이후 어려운 사업환경에도 불구하고 매출액 100억을 넘어섰다. 뿐만 아니라 차세대 모바일 제품은 유니링, e콜드 시스템 등을 직접 개발하는 등 자체 기술력도 확보한 상태다.

 신 사장은 올해 ‘통신 단말기 및 그것을 이용한 광고방법(특허)’을 통해 모바일 콘텐츠 시장에 진입하기로 했다. 국내 시장뿐만 아니라 특허 등록된 인도네시아 , 베트남, 싱가포르, 호주 등으로 진출해 이제 세계 시장에서 인정받는 기업을 만들겠다는 포부다.

 “모든 일에 나만 유리한 협상은 어려운 일이기도 하고 성립되지도 않아요. 상호신뢰가 중요하죠.” 그가 건네는 사업비결이다.

 신경철 유진로보틱스 사장(47)도 지난 90년 30대 후반부터 사업을 시작해 이제는 ‘대표’라는 호칭이 몸에 배었다. 미시간대 기계공학과 박사과정을 마친 뒤 삼성항공선임연구원을 지내다 바로 창업을 단행했다. 세계에서 사랑받는 로봇을 직접 만들어 보기 위해서다.

 그가 올해 드디어 사고를 치기로 했다. 교육 기능을 가진 가정용 로봇을 내놓겠다는 것이다. 당초 계획보다 조금 늦어지긴 했지만 기대는 더 크다. 이 로봇 판매만으로 올해 100억원 정도의 매출을 올릴 계획이다. 이밖에도 변신로봇, 위험지역 로봇, 축구로봇, 산업로봇 등 산업별로 다양한 로봇을 지속적으로 내놓아 추가매출 목표도 세운 상태다.

 “열심히 자기계발을 하면 아직도 많은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나라는 너무 일찍 실무에서 관리로 업무가 이동하는 경우가 많은데 고쳐야 할 점입니다.” 신 사장은 실력, 경험, 인간관계를 40∼50대의 가장 큰 경쟁력으로 꼽았다.

 <이병희기자 shake@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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