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초 정문술 전 미래산업 회장이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 300억원을 출연한 일은 유관 부처간 협력을 유도하는 좋은 사례다. 당시 정 전 회장은 KAIST에 거액을 출연하면서 한가지 조건을 달았다. 기계, 전자, 바이오 등 세 분야를 같이 다룰 수 있는 인물을 해외에서라도 찾아와야 하고 그렇지 못할 경우 출연을 철회한다는 조건이었다. 한 대학내에서도 과간 교류가 쉽지 않음을 알고 강제적으로 교류가 이뤄지도록 한 것이다.
부처간 갈등 문제는 새삼스럽지도 않다.
우선 무역·통상분야에서는 통상교섭본부가 당초 설립 목적인 통상교섭과 이에 필요한 국내 정책의 조정기능 이외에 각 품목 부처에서 수행하고 있는 통상진흥 기능까지 수행하면서 문제점이 발생하고 있다는 지적이 높다. 수입규제대책사업과 관련해서는 산업자원부가 예전부터 수행해 오던 수입규제 대책사업에 대해 외교통상부가 지난 2000년 9월 수입규제 대책반을 설치해 유사한 업무를 수행함에 따라 해당기업에 혼란을 주고 있다.
또 민간경제협력위원회 활동과 관련해서도 산자부가 지원하고 있는 민간경제 협력위원회 활동에 통상교섭본부가 이중으로 간여함으로써 대한상의 등 관련 민간단체와 업계에 혼선과 부담을 초래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에 따라 통상교섭 기능 이외에 통상교섭본부에서 중복수행하고 있는 통상진흥 기능은 개별 품목부처에서 수행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고 통상협상과 국내 경제정책과의 연계 문제나 부처간 이견 조정 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대통령 또는 국무총리 직속의 조정기구를 운영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또 과기부, 산자부, 정통부 등 R&D 3대 부처의 R&D 예산이 20개 정부부처 R&D 총예산의 65%를 차지하고 있지만 예산의 지속적인 확대와 기술의 융합화 추세 등으로 부처간 역할중복 문제와 투자영역 상충 등의 문제가 불거지고 있다. 따라서 부처별로 소관분야 투자에 집중하되 연계를 통한 효율성을 제고하고 연구단계별·분야별 R&D 예산의 적정 배분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이를 테면 과기부는 기초·원천기술을 전담하고 산자부 등은 응용·개발분야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과기부의 경우 응용·개발연구 투자재원을 기초연구분야로 전환하고 현 응용·개발연구사업은 산업담당 부처로 이관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또 기초기술개발결과는 산자부 등 관련부처 사업으로 연계해 사업화하고 산업관련 부처도 기초연구 지원을 지양하고 과기부의 기초연구와 연계를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산업관련 부처에서는 지난 94년 정통부가 출범하면서 산자부는 전자산업을, 정통부는 정보통신산업을 담당하게 했으나 IT인프라 구축의 마무리와 함께 정통부가 IT관련 분야로 업무영역을 확장함에 따라 타부처와 업무영역이 중복되기 시작했다. 특히 산자부와는 디지털전자 등 정보통신기기 제조분야에서 업무가 중복돼 국가적인 낭비와 업계의 불편이 발생하고 있다.
이런식으로 산자부와 정통부는 IT산업 분야에서 사사건건 부딪혀 왔고 매번 중복투자라는 꼬리표를 달아왔다. 특히 참여정부들어 범정부차원으로 전개하고 있는 차세대 성장동력산업 발굴·육성사업의 추진과정을 보면 부처간 주도권 다툼의 극치에 이른다.
미래전략산업인 신기술산업은 IT만의 스탠드 얼론이 아니라 기술융합화와 제조업과의 접목을 통해서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 IT, BT, NT, ET 등 신기술 분야는 상호 융합을 통해 기술혁신이 가속화하고 있고 주력기간산업은 디지털기술과의 접목을 통해 고부가가치 산업화하고 있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그리고 통신·네트워크가 융합하는 디지털컨버전스 시대에 산업분야를 무자르듯 할 수 없다.
다시말해 통신·방송·네트워크·가전·반도체 등이 결합돼 산업기술이 고도화되면서 IT, BT, NT, ET 등 신기술 분야는 융합의 융합을 거듭하고 있다. 결국 정부 부처간의 갈등 요소를 없애고 자연스럽게 협력을 이끌어 내야 하는 게 과제이다.
전문가들은 IT산업 정책기능을 통합하거나 조정기능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여왔다. 산업일선 수요자 중심의 IT활용 확대와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결합을 통해 산업전반의 생산성 제고가 필요하고 정책의 일관성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산업과 학문분야에서도 퓨전(융합) 현상이 일어나고 있듯이 정부부처의 역할 조정에도 퓨전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재경부, 과기부, 산자부, 정통부 등 경제와 산업관련 부처를 하나로 묶어 관장하게 하는 경제산업부총리의 역할을 신설해야 한다는 의견이나 경제부총리와 함께 기술 및 산업을 총괄하는 기술부총리제 신설 등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고 있다. 또한 각 부처가 공통된 과제에 대해서는 공동으로 태스크포스를 구성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업계에는 또다른 입장이다. 공무원들 스스로 밥그릇싸움과 같은 구태의연한 자세에서 벗어나야 하며 조직개편도 영역 재조정보다는 이같은 환경을 조성토록해야한다는 주장이다. 이같은 인식변화를 전제로 정부도 민간과 마찬가지로 더이상 정책을 독점해서는 안되며 일정부분 선의의 경쟁이 이루어져야한다는게 중론이다. 다만 협력과 화합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부처 공무원들의 인식전환이 중요하다는 지적이다.
<주문정기자 mjjoo@etnews.co.kr>
◆ 인터뷰 - 김태유 청와대 보좌관
“자동차 산업이 초창기에는 화학업종으로 여겨졌습니다. 연료가 중요했기 때문이지요. 이후 엔진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기계업종으로 바뀌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전자산업쪽으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김태유 대통령비서실 정보과학기술보좌관은 기술의 발전이 산업의 진화를 가져오면서 산업 간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산업 사회에서 지식기반 사회로 이동은 산업 뿐만 아니라 정부 조직의 끊임없는 변화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과기부와 산자부, 정통부 등 과학기술과 관련된 3개 부처의 역할 중복이 제기되는 것도 이같은 맥락입니다.”
그는 현재 정부 조직 간 업무 조정이 자꾸 거론 되는 것은 기술의 발전의 가져온 필연적인 결과라고 설명했다. 김 보좌관은 과거에는 산업이 기술을 좌우했지만 이제는 과학기술이 산업의 방향을 이끄는 형태로 변화하는 현실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후기 산업사회를 거쳐 이제 우리는 지식 정보화 사회에 돌입하고 있습니다. 삼성전자가 세계적인 기업이 된 데는 기술을 바탕으로 산업을 육성하는 전략을 수립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기업과 마찬가지로 정부 조직에도 이와 같은 전략을 도입해 발빠르게 대처해야 할 때라고 지적했다.
김 보좌관은 내년 총선 이후 과기, 산자, 정통 등 과학기술 관련 부처를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정부 조직 개편을 계획하고 있다고 밝혔다.
“과기, 산자, 정통부의 유기적 통합과 조정은 시급한 문제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정부부처 간 밥그릇 싸움 문제가 아니라 국가의 미래를 책임질 과학기술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기술의 융합 시대에 각 부처의 영역을 세밀하게 나누기는 어렵다며 이들을 총괄하는 새로운 형태의 정부 조직의 필요성이 높아졌다고 강조했다.
김 보좌관은 내년 총선 이후 3개 부처의 역할과 예산, 인력을 담당하는 하나의 조정기구를 설립해 차세대 성장동력 등 국가 발전을 위한 장기계획을 이끌 것이라고 말했다.
“하나의 총괄 조직이 3개 부처의 예산과 인력을 교류하는 형태가 가장 바람직한 대안으로 떠올랐습니다. 이 역할은 국가과학기술위원회나 기술부총리가 맡을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기존의 국과위는 역할이 미흡하다는 평가가 많으므로 기술부총리에게 맡기는 게 현실적 대안일 것입니다.”
김 보좌관은 지식기반 사회에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경제를 만들기 위해서 부처 간의 벽을 허무는 것은 물론 기술을 기반으로 미래 가치와 경제 현상을 이해하는 의식 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정부 부처 간 화합은 이제 단순히 정부만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의 미래가 달린 중대 사안입니다.”
<김인순기자 insoon@etnews.co.kr>
◆ 산자-정통부 `전자무역·물류` 공조 대표사례
기업·단체 할 것 없이 모든 조직은 일정한 업무 구분을 갖는다. 그러나 그 구분은 결코 완벽할 수 없다. 상황에 따라, 여건에 따라, 중요도에 따라 어느 측면에서 보면 아주 잘 분류해 놓은 듯 보이다가도 조그만 문제점 하나만 제기되면 너무 엉성한 분류로 치부되기 일쑤다. 정부 부처도 이와 비슷하다.
끊임없이 효과적인 틀을 생각해도 모두가 만족할 만한 모양새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런 문제는 이제 큰 틀을 존중하면서 내부 실무차원에서 효율적 정책추진을 위해 협력하고 화합하는 것으로 풀어가야 한다.
갈등 구조에서 부처 실무자간 협력을 추구하는 이같은 사례는 여러 곳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전자무역과 전자물류 분야가 작지만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전자무역과 전자물류’. 두 개념은 언뜻보기에 어느 한 쪽이 다른 쪽을 포괄하는 듯 보이지만 전자무역은 화주(수출업자) 입장에서의 편의성을, 전자물류는 운송인프라적인 측면이 강조된다. 이 때문에 전자무역쪽은 산자부 중심으로, 전자물류쪽은 정통부가 중심이 돼 국가전략을 수립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추진되는 전자무역과 전자물류의 업무재설계(BPR) 및 정보화전략계획(ISP)은 업무영역을 놓고 부딪히는 산자부와 정통부가 각각 주관하고 있다.
비슷한 개념 때문에 일반인들은 그 차이를 구별하지 못하는 두 사업은 그러나 BPR ISP 추진과정에서 대표적인 부처간 공조사업으로 평가받고 있다. 큰 틀은 각각 추진되지만 실무자급에서 최대한 협의를 거쳐 효율성을 제고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이들 사업은 현재 부처조직에서는 현실적으로 각각 진행될 수 밖에 없다. 무역은 국가간, 물류는 내부운송을 포함하는 범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술적인 부분에서 실무자간 협의 수준을 높임으로서 중복을 최소화하고 있다. 이를 통해 향후 여건이 무르익으면 궁극적으로 통합적인 중장기 정책을 마련한다는 게 정부의 기본적 방침이다.
또 대표적인 갈등 구조로 비춰지고 있는 중소기업 정보화 분야의 부처간 경쟁도 나름대로 효과적인 정책 추진을 위한 부처별 노력의 산물이다. 산자부·정통부·중기청 모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인프라를 최대한 활용해 국가정보화의 보틀넥인 중소기업을 효과적으로 정보화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각 부처 담당과장들의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이다. 부처 담당과장들은 최근 만남을 갖고 상대부처의 정책을 경청하고 자 부처의 입장을 전달했으며 이같은 모임을 정례화하기로 약속하기도 했다. 이 또한 정해진 큰 틀의 범위에서 실무차원의 시너지를 높이기 위한 작지만 대표적인 부처 협력사례로 이야기되고 있다.
<심규호기자 khsim@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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