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공계 출신 CEO들이 말하는 이공계 기피요인과 대안
이공계 기피현상은 힘든 일을 기피하는 사회 풍조, 이공계에 대한 자부심 몰락, 미래에 대한 불안감, 정책 부재 등 다양한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요인이 다양한 만큼 해법도 여러방안이 제시된다. 이공계 출신 CEO들이나 대기업 임원들은 “현재의 이공계 기피현상을 그대로 둘 경우 치명적인 결과가 초래될 것”이라며 “정부·기업 모두 힘을 합쳐 근본적인 치유책을 모색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최근 코스닥 등록으로 1000억원대의 자산가가 된 레인콤의 양덕준 사장은 “이공계 기피 현상은 소득이 높아지고 선진국 산업의 형태로 이행해가면서 일어나는 피할 수 없는 공통적인 현상이지만 제조업 공동화와 마찬가지로 국민소득 2만달러도 요원한 시점에서 나타나기 시작해 문제가 심각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공계 기피 요인으로 △취업후의 임금 및 대우가 금융·법률·서비스 직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고 △이공계 스타 CEO가 적은데다 △공부도 힘들고 재미없다는 이유 등을 들고 있다. 양사장은 “이공계 기피현상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선 기업이든 정부든 사회 각 분야에서 이공계의 역할과 활동영역의 폭을 넓히고 채용을 대폭 확대해야 한다”며 “그 이후에 우수 인력을 유도하기 위해 파격적인 보수를 지급하는 연구소를 설립하는 등 정책적인 배려와 인프라가 구축돼야 한다”고 해법을 내놓았다.
벤처 1세대인 변대규 휴맥스 사장은 이공계 출신들이 희생정신을 강조했다. 그는 “과학기술 분야나 기업현장 일은 미래를 개척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성격이 강한 ‘가치 창조형 업’”이라며 “문제는 이러한 가치 창조형 업이 필요한 땀과 수고에 비해 수입이나 직업적 안정성 등의 경제적 이익이 크게 주어지지 않는 종류의 직업들”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우리 사회가 젊은 인재들이 다시 가치 창조형 일에 도전하고 그 일을 통해 보람과 성취감을 가질 수 있도록 사회적으로 고무시키고, 시스템적으로 뒷받침해야 한다”며 “이를 위해 사회에서 비전을 설정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LGIBM의 류목현 사장은 “이공계 육성 정책을 창조적 소수의 기술인재와 실용중심의 엔지니어 육성정책으로 나눠서 할 필요가 있다”며 “소수의 기술인재는 놀랄만큼 우대돼야 하며 실질적 밸류를 만드는 엔지니어는 성과만큼 대우해주는 보상체계를 갖춰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미 평범한 직장인 수준에 지나지 않는 수백만의 법률가와 의사들이 있는 미국사회를 보고 이공계 출신들도 시각을 바꿔야 한다”며 “제2의 ‘빌 게이츠’가 될 수 있다는 좀 더 큰 도전의 꿈을 키우기를 부탁한다”고 조언했다.
LG전자의 한 임원은 이공계 기피 해법에 대해 “변호사, 의사, 변리사 등 국내 소수 전문가 집단들은 배출 인력을 자신들이 제한하는 등 특권을 그대로 유지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며 “이공계 기피 현상이 상대적 박탈감에서 적지 않은 요인을 제공하며 결국 이 특권 계층에도 진입제한을 없애면 인력의 균형 배급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국내 중소기업의 한 연구소장은 “국내 이공계 기피현상은 창의적인 업무보다는 단순 하드웨어 트러블 슈팅, 프로그램 작성 등에 머무르고 있는 국내 산업구조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며 “이러한 구조하에서는 엔지니어로서 보람을 찾기 어려우며 국내 IT산업이 보다 핵심 기술을 개발하는 고도산업 구조로 가야 이공계 기피현상이 극복될 것”이라고 말했다.
<유형준기자 hjyoo@etnews.co.kr>
◆ 이공계 출신 기성세대는 요즘…
서울의 한 명문대학 공대를 졸업하고 8년째 국내 굴지의 LCD기업에 근무중인 P과장은 최근 들어 부쩍 직장생활에 대한 회의감이 든다.
제조파트에 근무하는 P과장은 보통 오전 8시부터 오후 9시반까지 근무하며 2주일에 한번 쉰다. 주 5일제를 이미 실시중인 은행이나 자사내에서 5일제 근무를 실시하는 다른 파트 사람들은 완전히 다른 세상 얘기다. 애들 양육은 전적으로 와이프 몫이 됐다. 현재의 생활도 걱정이지만 앞으로의 생활을 생각하면 더욱 답답함을 느낀다. 회사가 지속적으로 근무인력을 계약직, 협력회사로 분사하면서 미래에 대한 불안이 엄습해온다. 또 자신의 미래가 될 수 있는 일부 부장급 이상의 간부 사원의 경우에는 1년에 한번도 쉬지 않은 예까지 보았다. P과장은 “직장생활이 생활의 전부가 되버렸다”며 “삶 자체에 회의를 느낄 때가 갈수록 많아진다”고 밝혔다.
대기업의 비디오 관련 제품 개발 연구소에 근무하는 K선임연구원. 입사한지 9년째가 되어 가지만 후배사원이 없다. IMF 이후 인력 충원을 최대한 억제했기 때문이다. 9년째 제품 개발 업무에 매달려왔지만 그다지 자신의 능력이 향상된 것 같지 않다. 제품 연구소의 경우 획기적인 제품에 대한 개발보다는 기존 개발품의 업그레이드에 그쳐, 어떻게 보면 반복작업에 머무르고 있다. 그는 “국내 IT산업이 제조·단순 제품 개발력 향상에 머무르다 보니 핵심기술·표준 등 실제 R&D를 하는 파트는 극수수”라며 “그러다보니 몇년이 지나도 같은 일을 반복하게 되고 일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리게 된다”고 설명했다.
미국 대형 통신회사의 연구소에서 근무하다 올해 초 국내 K대학에 전임교수로 부임한 K교수는 보통 퇴근 시간이 밤 10시에서 11시 사이다. 학생 강의를 준비하는데도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데다가 학교에서 교수평가하는 기준의 하나로 국제논문 제출 건수를 내세우면서 논문 발표도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느끼면서도 학교측에서 기업들로부터의 프로젝트 수주를 강조하는 데에 대해서는 적지 않은 스트레스를 느낀다. K교수는 “학교에서 공대 교수들에게는 만능 엔터테이너로서의 역할을 강조한다”며 “몸이 2개라도 부족한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대기업에 책임 연구원으로 근무하다 2000년 즈음에 명예 퇴직한 J씨. 98년 IMF가 닥치면서 그가 근무했던 연구소는 해체됐다. 이곳에서 근무하던 인력의 90%는 해당회사의 다른 파트 및 계열사로 전배 받았지만 결국 80%가 넘는 인력이 그 회사를 자의반, 타의반으로 떠나야 했다. 그도 2년간 다른 파트에 있다가 결국 퇴직했다. 타 회사를 두드리기도 했지만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재취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요즘은 증권사에 나가서 소일하는 게 주요 일과다. 그는 “수십년을 엔지니어로 근무했지만 얻은 게 없다”며 “나야 그래도 할만큼 하다가 나왔지만 최근 모습을 보면 한국의 미래에 대해 암담하다는 생각뿐”이라고 덧붙였다.
국내 최고의 대학을 졸업하고 국내 굴지의 국책연구소에 근무했던 P씨. P씨는 그곳 연구소에서 최고의 연구원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장래를 보장받았지만 국책연구소를 박차고 다시 수능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목표는 지방대 의대다. 연구소 동료들은 서울에 소재한 대학의 의대나 한의대를 목표했을 것으로 예상했지만 현재 커트라인을 감안하면 지방대 의대도 버거운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모습들은 2000년대의 한국 이공계의 자화상이다. 한때는 수출 역군, 산업 역군으로 자부심과 주위에서 인정을 받았던 이공계들이 심한 몸살을 앓고 있다. 비록 수년동안 국민 소득이 1만달러에 머물러있지만 여기까지 오기에는 70, 80년대의 이공계를 우대하는 사회 분위기가 결정적이었다는 평가다. 이공계 기피 현상이 심화되고 있는 2000년도를 거쳐 2010년, 혹은 2020년에 우리의 미래를 예상하는 것은 끔찍하다. 이공계 기피현상 극복은 국가 장래를 위한 가장 시급한 과제다.
<유형준기자 hjyoo@etnews.co.kr>
◆ 인터뷰 - 대입수험생 진로지도 이영덕 대성학원 평가실장
“IMF 환란을 계기로 서울대 공대 커트라인이 지방대 의대나 한의예과보다 떨어지는 역전현상이 발생하기 시작했으며 갈수록 더욱 심화되는 추세입니다. 이공계 기피현상이 앞으로 몇년동안 지속될 경우 우리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인력수급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것입니다.”
20여년 동안 현장에서 입시 지도를 해온 이영덕 대성학원 평가실장은 학과의 부침과 수험생들의 응시패턴을 가장 근접한 위치에서 접해온 사람이다.
이 실장은 “수험생들의 이공계 기피현상은 심각한 수준이며 특단의 대책이 마련되지 않고는 국가 경쟁력에도 적지 않은 악영향을 미칠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2002학년도 정시 모집에서 서울대 공대의 경우 상당히 많은 모집 단위에서 미달 사태를 맞으면서 많은 대학에서 이공계열의 경우 경쟁률도 낮아지고 합격선도 떨어지는 현상이 벌어졌다”며 “3년전부터 서울대 공대와 지방의대를 복수 지원하여 동시에 합격하였을 경우 지방의대를 선택하는 수험생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올해에는 일부 서울대 공대 커트라인이 명문대 약대보다 떨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실장은 “그는 대학에 재학중이거나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 중에 다시 수능시험에 응시하여 의대와 한의대를 가겠다는 수험생들이 늘어나고 있는데 규모가 큰 재수생 종합반 학원의 경우 서울과 지방을 막론하고 이런 수험생들이 수백명에 이르고 있다”고 의대·한의대 열풍을 설명했다.
수험생들이 이공계를 기피하는 것에 대해 “수험생 본인보다는 학부모들의 강요에 의한 경우가 많다”며 “최근에 직장인들이 무더기로 젊은 나이에 퇴출되는 현상을 지켜본 수험생들과 학부모들이 좀더 안정적인 의대·한의대를 선택하고 교육대학이나 사범대학에 많은 수험생들이 지원한 것도 졸업후 안정적인 직장을 가질 수 있느냐가 학과 선택기준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수험생들에게 현명한 선택을 당부했다. “현재의 커트라인은 수험생들이 졸업할 시기인 7, 8년후의 장래를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며 “적어도 앞으로 10년이 지난 후의 직업 전망이나 유망 직종 같은 것을 한번쯤은 알아보고 본인의 적성을 고려하여 진로를 선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또 이공계 커트라인이 낮아진 만큼 지금이 이공계 진학의 최적기라는 설명이다.
<유형준기자 hjyoo@etnews.co.kr>
많이 본 뉴스
-
1
스타링크 이어 원웹, 韓 온다…위성통신 시대 눈앞
-
2
美 마이크론 HBM3E 16단 양산 준비…차세대 HBM '韓 위협'
-
3
LG 임직원만 쓰는 '챗엑사원' 써보니…결과 보여준 배경·이유까지 '술술'
-
4
단독CS, 서울지점 결국 '해산'...한국서 발 뺀다
-
5
애플페이, 국내 교통카드 연동 '좌초'…수수료 협상이 관건
-
6
NHN클라우드, 클라우드 자격증 내놨다···시장 주도권 경쟁 가열
-
7
초경량 카나나 나노, 중형급 뺨치는 성능
-
8
美매체 “빅테크 기업, 엔비디아 블랙웰 결함에 주문 연기”
-
9
카카오헬스, 매출 120억·15만 다운로드 돌파…日 진출로 '퀀텀 점프'
-
10
BYD, 전기차 4종 판매 확정…아토3 3190만원·씰 4290만원·돌핀 2600만원·시라이언7 4490만원
브랜드 뉴스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