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 신년특집]방송·통신의 만남

 직장인 김 모씨는 퇴근 길에 지하철에서 휴대폰으로 프로야구 생중계를 관람한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TV를 켜고 데이터 방송 화면으로 들어가 간단한 리모콘 조작으로 피자를 주문해 저녁을 해결한다. 심야에는 최근 개봉 영화를 즉석에서 주문, 편안하게 감상한다. TV뱅킹으로 밀린 공과금도 처리한다.

 미래 SF 영화의 한 장면이 아니다. 이 모든 일들은 가까운 미래가 아닌 현재 우리 곁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다. 지금까지 방송망과 통신망을 통해 분리 제공돼온 컨텐츠와 서비스가 경계를 허물고 융합 서비스로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융합은 단순히 기술의 발달로 인한 기술 융합뿐 아니라 서비스와 시장의 융합을 병행해 현실화되고 있다. 이같은 변화는 사업자간 역학 구도와 시장의 구조는 물론 컨텐츠 유통 체계, 사용자의 생활 패턴, 법·제도적인 틀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혁신적인 패러다임 이전으로 받아들여진다.

 ◇방송·통신 융합, 시대의 대세=방송·통신 융합이란 정보통신(IT)과 디지털 기술의 급속한 발전으로 인해 유·무선, 통신과 방송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것으로 현재 진행중인 모든 기술의 통합 내지는 융합 가운데서 가장 빠르고 광범위하게 확산되는 영역이다. 이는 이미 수년 전부터 현실화됐던 ADSL망으로 TV방송을 시청하고 케이블TV망으로 초고속인터넷 서비스를 제공하는 수준을 뛰어넘어 대부분의 차세대 통신·방송 서비스가 ‘융합(Convergence)’으로 귀결되고 있다. 망 융합 측면에서 보면 xDSL망이나 이동통신망을 통한 주문형비디오(VOD) 서비스처럼 통신망을 활용한 방송 컨텐츠 제공이 있는가 하면 케이블TV망을 통한 VoIP나 양방향 데이터 서비스 등은 반대의 경우에 속한다.

 시장과 사업자 측면의 융합도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지난해 통신·방송 시장의 첫 번째 화두는 단연 융합이었다. 케이블TV사업자들은 디지털 전환이 가시화되면서 VOD, VoIP, 데이터방송 등을 제공하는 디지털미디어센터(DMC) 구축을 위한 종합유선방송사업자(SO)간 이합집산을 거듭했다. 또 SK텔레콤과 KT가 위성 디지털멀티미디어방송(DMB) 사업권 획득에 도전장을 던졌다. 무엇보다 방송사업자와 통신사업자가 서로 타 영역에 진출하면서 지분 참여, 전략적 제휴, 인수 등을 통한 외형적인 결합 사례도 속속 등장했다. LG는 BSI가 추진하는 DMC에 대규모 자금을 지원하면서 방송 시장 진출을 선언했으며 KT도 스카이라이프와 번들링 상품 출시를 눈앞에 두고 있다. SO의 디지털케이블 본 방송이 본격화될 올해에는 DMC 참여를 놓고 사업자간 ‘헤쳐모여’가 급물살을 타는 한편 통신사업자들의 방송 시장 공략도 점차 거세질 것으로 전망된다.

 ◇통합규제기구 설립 논의 가시화=이처럼 기술과 사업자간 통합이 빠르게 진전되는 가운데 제도적인 틀 마련을 위한 관련 정부 부처간 논의도 올들어 보다 활발해질 것으로 기대된다. 융합 서비스의 대부분이 경계를 명확히 구분짓기 어려운 만큼 사업자에 대한 관리 감독 및 규제, 지원 주체를 정하는 것도 쉽지 만은 않은 과제다. 미국, 영국 등 선진국들은 방송·통신 융합이 진전되면서 기존에 이원화돼 있던 규제 기구를 통합하는 추세가 뚜렷하다. 우리의 경우는 방송 정책 기능은 방송위원회가 총괄하나 주파수 배분, 기술기준 고시 등 기술 정책 기능은 정통부가 담당한다. 방송사업자 허가 시에도 허가추천은 방송위가, 무선국 허가는 정통부가 하도록 이원화돼 있다.

 이같은 상황에서 신규 서비스에 대한 규제권을 놓고 양 부처간 갈등이 끊이지 않고 있다. 방송위가 방송법 개정안에 신규 디지털 방송과 함께 융합형 서비스를 제공하게 될 별정방송사업자 개념을 포함시키자 정통부가 별도로 법을 개정할 움직임을 보인 것은 하나의 사례다. DMB 등 당장 사업자 선정 작업을 추진해야 하는 시급한 현안들은 국회에서 법안 통과가 표류하면서 서비스 지연이 불 보듯 뻔하다.

이에 따라 양 부처의 기능을 통합하고 장기적으로 융합 서비스에 대한 정책을 총괄할 방송통신위원회의 설립 필요성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방송통신위원회는 융합 서비스에 대한 일관성있고 공정한 규제 정책을 펼 수 있을 뿐 아니라 향후 발생 가능한 규제 공백 문제를 해결하는데 꼭 필요하다는 데 이견을 제시하는 이는 없다.

 ◇올해 과제 및 전망=유료방송 사업자는 디지털 방송을 근간으로 한 각종 통방 융합 부가 서비스를 속속 선보이면서 진정한 뉴미디어 서비스 사업자로 거듭날 전망이다. 또 초고속인터넷 시장이 이미 포화상태에 다다른 상태에서 통신사업자들은 융합 서비스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굴하는데 역량을 집중하겠다는 목표다. 정부 차원에서도 언제 어디서나 끊김없이 차세대 융합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2010년까지 총 2조원을 투입해 네트워크 인프라를 재정비하는 광대역통합망(BcN) 구축 작업 등을 내놓고 있다. 따라서 이같은 노력들이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올해 통합 규제 기구 설립에 대한 논의를 공론화하는 동시에 사업자간 마찰을 방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들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통신 방송 융합 시장의 성숙에 대해 김창규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는 "대내적으로 통신 방송 산업의육성 및 경쟁력 강화를 도모하고 대외적으로 통신방송 산업의 환경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통신과 방송 규제 기구의 통합이 불가피하다"며 "현행 모형의 한계를 극복할 새로운 통합 기구 설립 논의를 이제 시작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김유경기자 yukyung@etnews.co.kr>

 

 ◆ 선진국 방송·통신 융합 규제기구 사례

 방송·통신 융합의 가속화에 따라 선진 외국의 정책·제도적인 변화 및 사례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현재 대다수 선진국에서는 방송통신 규제 기구를 일원화해 통합기구를 설립하는 추세가 뚜렷하다. 특히 통합 위원회를 설치하더라도 방송의 공공성 및 공익성을 훼손시키지 않고 기술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서비스 영역의 업그레이드를 뒷받침하도록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만하다.

 미국과 캐나다는 방송과 통신에 대한 감독기관이 독립적인 합의제 행정기관으로 통합돼 있는 대표적인 사례로, 초기부터 방송통신위원회로 출범했다. 미국은 연방통신위원회(FCC)는 연방의회에 직접 책임을 지는 독립연방규제위원회로, 방송·통신에 대한 기본 정책 수립 및 집행, 방송사업자 허가 등에 관한 업무를 총괄한다. FCC는 독립행정기관이지만 의회에 직접 책임을 진다는 점에서 타 주요국의 독립기관과 다르며, 위원 5인중 4명이 같은 정당에 속하는 것은 금지된다.

 캐나다의 CRTC(Canadian Radio, Television and Telecommunications Commisson)는 지난 73년 별도의 방송통신위원회법에 의해 설치 근거를 명문화했으며 캐나다 방송과 통신 부문의 규제 감독을 담당한다. 방송과 통신 담당 부위원장을 별도로 선임해 통합기관 내에서도 방송의 공공성 원리를 유지하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97년 설립된 이탈리아의 방송통신위원회(AGCOM)는 위원 임명시 인프라/네트워크 소위원회, 서비스/제품 소위원회 위원을 구분해 임명함으로써 기술·산업 정책과 상이한 방송과 콘텐츠 정책의 공공성을 확보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영국의 사례는 방송·통신 융합이 진전되면서 방송 통신 규제기구를 통합한 가장 최근 사례로 참고할 만하다. 영국은 지난해 상업TV방송위원회를 비롯한 기존 5개 방송통신 규제기구를 통합, OFCOM(Office of Communications)으로 묶었다.

 위의 사례와 달리 방송과 통신에 대한 감독이 내각으로 일원화돼 있으며 별도의 위원회를 두지 않는 국가는 일본이 대표적이다. 또한 방송, 통신 감독기관을 철저히 분리, 관장하는 사례로는 프랑스의 CSA, ART를 꼽는다. 프랑스는 방송쿼터, 내용규제, 공익성 등의 방송 철학과 규제 논리가 산업적 논리를 중시하는 통신과 융합되는 것을 경계하는 차원에서 분리를 고수한다. <김유경기자 yukyung@etnews.co.kr>

 ◆ 인터뷰 - 조강환 방송통신연구원장

 "방송·통신 융합의 기술 진화는 빠르게 진전되고 있으나 이를 뒷받침할 만한 법·제도적인 장치가 마련되지 않은 것이 가장 시급한 과제입니다. 이같은 상황에서 현재 이원화된 규제기구를 통합한 방송통신위원회의 설립을 더 이상 늦출 수 없습니다"

 조강환 방송통신연구원장은 "방송과 통신의 융합 서비스가 이미 뚜렷이 가시화되고 있으나 부처간 갈등 및 방송 표준 등을 둘러싼 이견 등이 산업 육성 및 경쟁력 강화의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며 이를 해결할 만한 대안으로 통합 규제기구 설립을 서둘러야 한다는 대안을 제시했다.

 1기 방송위원회에서 디지털방송추진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면서 국내 디지털 방송 및 통신·방송 융합 관련 정책 마련에 지속적으로 참여했던 조 원장은 "3기 디지털방송추진위원회에서 디지털미디어센터(DMC) 등 방송 통신 융합 서비스에 대한 전반적인 정책을 수립했으나 이를 실현시키는 데는 예상보다 많은 시일이 소요되고 있다"며 "2기 방송위원회가 최근 융합에 따른 장기적인 대응방안 마련에 착수한 만큼 통합 규제기구에 대한 논의도 본격적으로 시작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국내 방송 통신 융합의 진행 상황과 관련해 조 원장은 "방송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디지털화가 진행되면서 뒤따르는 각종 부가 서비스들이 융합의 영역에 자연스럽게 포함되며 통신 사업자의 입장에서도 번들링 서비스 등을 통해 방송 시장 진출을 꾀하고 있다"며 "이같은 상황에서 이를 관리할 기구를 통합하지 않는다면 부처간 갈등이 심화되는 것은 물론 산업의 조기 활성화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충고했다.  

 통합 기구의 형태에 대해 조 원장은 "국가기관형, 정부기관형, 민간기구형, 현행 방송위와 동일한 모델 등 여러가지 형태를 고려할 수 있으나 대통령 직속 기구로 설립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라며 "통합 위원회의 구성을 9인으로 할 경우에는 국회, 행정부, 사법부가 각각 3인을 추천하는 방식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시했다.

 조 원장은 또 "통합 기구의 출범과 병행해서 방송 통신 융합 시대에 걸맞는 법 개정도 필요할 것"이라며 "현행 통합 방송법 대신 방송통신기본법, 방송통신사업법, 방송통신설비법 등으로 법 체계를 정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유경기자 yukyung@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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