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파 디지털TV 전송방식을 미국식에서 유럽식으로 변경할 경우 12조원 안팎의 사회경제적 비용이 소요되며, 지금 단순한 기술 우위논쟁은 무의미하다는 학계의 주장은 소모적인 디지털방송 논쟁을 불식시킬 수 있는 참으로 시의 적절한 지적이라 하겠다.
행정개혁시민연합 주최로 9일 열린 ‘지상파디지털TV전송방식토론회’에 참석한 학계 인사들은 97년에 정통부가 디지털TV전송방식을 미국식으로 결정한 정책이 타당했다고 한 목소리로 지적했다. 이 같은 주장은 우리나라의 디지털TV수신기 기술과 생산 능력이 미국식의 경우 세계 최고의 수준을 자랑하고 있으며, 방송 기술 및 콘텐츠산업에서 선도국으로 도약하려면 HDTV 시장을 장악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근거로 내세우고 있다. 또한 갈등의 불씨인 ‘전송방식’과 관련한 이동방송 논쟁도 방송과 통신의 융합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경쟁구도의 관점에서 거시적인 안목으로 이해해야 할 사안이라고 따끔하게 충고하고 있다. 특히 새롭게 전개될 디지털방송시장에서 우리가 수확하게 될 경제적 효과와 시청자의 권익, 방송의 공익성, 정보격차 등의 문제는 단순히 기술적 전환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학계의 지적도 관련 당국은 고려해야 할 사안이다.
그 동안 전송방식 정책과 관련된 방송위와 정통부의 미묘한 신경전을 바라보는 업계나 일반 국민들의 시선은 곱지마는 않았다. 가뜩이나 경제가 불안한 이때, 차세대 성장동력의 하나인 디지털TV산업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정책을 놓고 불필요한 마찰과 비생산적인 설전으로 일관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혼란스러워 했던 것도 사실이다.
더구나 지난 달 30일에는 방송위와 정통부 합동조사단이 외국에 나가 조사를 벌이고 있는 와중에 방송위가 전격적으로 시·군 지역 지상파방송사 디지털TV 방송허가추천을 7개월 연기한다고 결의함으로써 사태는 감정싸움으로까지 번졌다. 방송위는 방송국 허가 추천 연기 결정이 디지털방송 일정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주무부처인 정보통신부는 곧바로 무책임한 주장이라고 공박하고 나섰다. 정통부는 방송위 허가 추천에 이어 정통부 허가가 난 이후에도 해당 방송사가 방송설비를 디지털로 업그레이드하려면 1년이라는 기간이 소요된다고 지적했다. 본방송 시한이 2005년 12월 31일임을 감안하면 늦어도 내년 연말까지는 허가가 나야 할 터인데 설령 그렇게 되더라도 정통부가 허가 심의를 할 수 있는 기간이 단축되어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전송방식을 놓고 더 이상 왈가왈부할 시점이 아니다. 미국식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 이미 대세로 굳어져 있는 상황에서 논란거리를 확대 재생산하는 행동이나 발언은 그만 두어야 한다. 누구의 주장이 맞고 틀리다고 시시비비를 가리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막중 국가 대사를 놓고 정치판처럼 티격태격하는 모습은 참으로 민망하다.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진다는 속담처럼, 방송위와 정통부의 싸움에 속앓이만 하고 있는 것은 디지털TV 개발에 목을 걸고 있는 가전업체들이다.
이 달 중순께면 각국의 디지털방송 현황을 파악하러 간 공동조사단이 돌아온다고 한다. 공동조사단이 돌아오면 객관적이고 냉정한 눈으로 문제점을 찾아내고 보완해서 정책 집행에 나서겠지만 ‘또 다른 논란거리’를 야기하지 않을까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다. 모처럼 학계에서 본의 아니게 중재자 역할을 한 셈이지만 이번 토론회의 지적을 적극 수용해 방송위와 정통부 모두 대국적인 견지에서 머리를 맞대고 국익 차원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는 성숙한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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