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만 해도 무선호출기(삐삐) 시장은 1500만명의 유료 가입자를 거머쥔 거대사업으로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휴대폰 서비스가 본격화되고 인터넷 시대가 활성화되면서 무선호출기는 순식간에 우리 곁에서 잊혀져 갔다. 현재 서비스 가입자는 14만명선으로 전성기의 100분의 1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이 때문에 이제 삐삐는 사라지고 광대역 통신 인프라만 남았다. 그러면 수천억 원의 거대한 비용이 투자됐던 당시의 인프라는 아무 쓸모없이 이대로 용도 폐기될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하지만 폐기되다시피 한 무선호출망을 활용한 재미있는 사례가 있다.
정보의 양이 제한되고 단방향이라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삐삐는 저비용으로 지속적인 정보의 송수신이 가능하다는 장점으로 새로운 기능을 담당하게 됐다.
필자는 최근 국내 한 벤처기업이 무선호출망을 이용해 실시간 교통정보를 제공하는 텔레매틱스 서비스를 시작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택시에 장착된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을 이용해 수도권 전역의 교통정보를 수집하고 삐삐망을 통해 도로별 혼잡도를 실시간으로 제공한다는 이야기다. 이 서비스를 이용해 강북에서 강남으로 이동하는 운전자는 한남·반포·동호 대교 등의 차량 속도를 실시간으로 파악해 가장 원활한 교통 흐름을 나타내는 다리를 건너면 된다. 휴대폰망을 이용하는 실시간 교통정보 서비스보다 이용요금이 저렴하고 라디오 교통방송과 달리 사용자가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지역의 교통정보를 파악할 수 있어 유용하다는 설명이다. 과거 숫자만 날리던 삐삐망이 참신한 아이디어를 무기로 수도권 운전자들의 고민을 해결하며 교통정보 서비스 채널로 부활한 사례다.
이제 삐삐를 차고 다니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지만 해외 일부 국가에서는 그렇지 않다. 한때 삐삐강국이었던 우리나라의 기술력을 바탕으로 외국시장을 누비는 삐삐의 해외활약상도 흥미롭다.
국내에서 의사나 대학생 등 일부 계층만이 사용중인 삐삐는 최근 중국을 비롯해 미국·캐나다 등에서는 일반인 사이에서도 인기다. 국내 삐삐가 때아닌 수출호황을 맞고 있는 것도 내수에 집착하지 않고 과감한 시장 뛰어넘기로 제품가치 제고를 위해 노력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시장특성과 소비 트렌드를 잘 분석했기 때문이다. 북미에서는 우리와 달리 휴대전화 수신자도 비용을 지불하기 때문에 일부 소비자들은 휴대전화 받기를 꺼린다. 또 기업 차원에서도 비용절감 차원에서 직원들의 무선호출기 사용을 장려해 삐삐 수요가 늘고 있다는 것이다.
기업가치를 높이는 데는 다양한 방법이 있지만 소자본과 인력으로 승부를 거는 벤처기업의 생명은 아이디어다. 무릎을 치며 감탄하게 만드는 아이디어는 우리 경제의 미래를 여는 열쇠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아이디어들은 때를 잘못 만나거나 적절한 후원자금을 확보하지 못해 사장되기 일쑤다. 유비의 재정적 후원자인 자중, 미켈란젤로를 도왔던 메디치 가문, 그리고 공자의 후견인인 거백옥 등은 모두 성공한 인물들을 뒷받침했던 든든한 후원자들이다.
벤처기업들은 성공확률이 높지 않은 ‘모험기업’으로 성장과 도약을 지원할 든든한 후원자가 절실히 필요하다. 물론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와 같은 대기업에 투자하는 것이 안정적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벤처기업들의 참신한 아이디어를 후원하는 일은 우리 경제의 미래에 투자하는 것이라 믿는다.
다행히 최근 국내 벤처캐피털의 투자방식도 과거처럼 여러 곳에 투자해 대박을 기다리는 스프레이앤프레이(Spray&Pray) 방식의 소극적 투자에서 벗어나 ‘될성부른 기업’을 엄선해 초기 투자부터 지속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는 적극적인 투자방식으로 바뀌고 있다. 앞서 얘기처럼 참신한 발상으로 추억의 삐삐가 되살아나듯이 벤처들이 시도해 봄직한 아이디어들은 무궁무진하다. 그러면 그 뒤에는 적극적인 후원자가 나타날 것이다. 벤처들이여 한번 크게 저질러보라.
◆ 박동원 한국기술투자 상무 dwpark@kti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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