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사는 중견 수동부품업체다. 이 회사는 국내 굴지의 세트업체로부터 수동부품 개발을 의뢰받았다. 1년 넘게 5억원 규모의 자금을 투입해 세트업체의 요구대로 부품을 개발했다. 그러나 세트업체는 값이 싸다는 이유로 중국산 제품을 구매했다. 공들인 시간과 돈이 한순간에 날아갔다. A사의 사장은 “세트업체가 원가절감 차원에서 부품 개발을 위탁했으면 최소한 인건비와 개발비 등을 회수할 수 있을 정도로 부품을 구매해줘야 상도의에 맞는 것이 아니냐”며 분을 삭혔다. 하지만 거대 고객인 지라 제대로 항변도 못했다. 이 사장은 “그래도 우리는 나은 편”이라면서 “중소 부품업체들의 경우 기껏 개발했더니 세트업체가 시제품을 중국업체에 샘플로 주고 생산하라고 했다는 소리도 심심찮게 들린다”고 말했다.
ADSL모뎀 업체인 B사도 몇년전 비슷한 경험을 했다. 대형 통신회사의 요구대로 제품을 내놓았더니 이 통신회사가 느닷없이 전략을 수정하는 바람에 개발 성과가 수포로 돌아갈 위기에 놓였다. 다행히 다른 회사에 판로를 뚫기는 했으나 사전에 어떤 정보라도 있었더라면 지금보다 상황이 호전됐으리라는 게 이 회사 사장의 푸념이다.
업종을 막론하고 ‘윈윈(win-win)’이 상호 협력의 대명사로 자리잡았다. 협력관계에 있어서 우리 회사도 살고 상대방 회사도 살린다는 뜻이다.
하지만 국내 제조업 현장에선 윈윈전략은 여전히 빈 말에 그칠 뿐이다. 세트업체로 불리우는 대기업과 부품 또는 하청업체로 불려지는 중소기업들 사이에 고착화한 이른바 ‘갑 을’ 관계 때문이다. 수요에 비해 공급이 달리는 메모리나 LCD패널 등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제조업에서 이러한 관계는 만연해 있다.
대부분의 경우 대기업들은 발주를 하고, 중소기업은 제조 또는 기술개발 형태로 대기업의 주문에 응하는, 먹이사슬 형태로 묶여 있다. 세트업체에 대한 의존도가 절대적인 구조하에서는 납품가 인하 요구를 수용하기에 바쁘다. 자체 개발을 비롯한 다른 부문에 연구개발력을 투입할 수 있는 여력도 없다. 이러한 사정은 세트업체의 가격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더욱 악화됐다.
국내에 세계적인 세트업체가 적지 않음에도 불구, 부품소재 분야에서 세계적인 업체가 없는 이유도 이러한 악순환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조에선 부품업체나 하청업체들은 경쟁력이 높아질 수 없다. 삼성SDI, LG필립스LCD 등 국내에 매출 1조원이 넘는 부품기업들도 있으나 모두 대기업 계열사 뿐이다.
세트업체들도 할말은 많다. 우선 정밀 금형 등 기술력이 필요한 부분에서는 일본업체들에 비해 많이 뒤쳐진다고 지적한다. 세트의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또한 가격 경쟁력에서 무섭게 따라오고 있는 중국업체들에게 크게 뒤쳐진다는 점도 국내 세트업체들의 불만 사항이다.
한 대형 전자회사의 부품구매 담당자는 “최근 전자제품의 경우 해마다 20%정도의 가격 인하 추세를 보이고 있어 부품업체들도 생산성 향상 등으로 이같은 가격 인하 추이에 대비해야 한다”며 “그러나 일부 부품업체들은 일단 대기업 협력업체로 등록되면 공급처를 바꾸기 어렵다는 점을 악용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긴밀한 관계를 이용해 협력업체가 배신을 하는 경우도 있다. 한 대형 전자회사 임원은 “한 두곳의 세트업체들만 거래하면 불안하고 경제적으로도 어렵다는 현실을 이해하지만 종종 동종업계에서 협력업체들이 관련 기술을 가지고 중국 업체들과 1대1로 거래하다가 공연히 피해를 봤다는 소리도 듣고 있다”고 전했다. 정보공유를 통한 밀월이 이상형이지만 현실적으로는 괴리가 있음을 보여주는 일면이다.
강용국 이트로닉스 상무는 “최근 중국으로 생산지를 옮기는 제조업체가 많은데 이런 추세 또한 협력업체와의 정보공유를 어렵게 하는 요인”이라며 “일부 업체들은 세트업체들을 따라 중국으로 이전하나 그렇지 못한 업체들은 도태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업계 전문가들은 어쨌든 갑 을 관계를 청산하지 않는 한 국내 제조업의 경쟁력을 높일 수 없다고 지적했다.적어도 기술 개발 만큼은 수평적인 동반자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디스플레이 재료업체인 휘닉스PDE의 이하준 사장은 “3년 이상 PDP파우더를 개발하면서 중소기업으로서 엄청난 위험 부담을 안고 가야 했다”면서 “시스템과 부품소재업체의 동반성장을 위한 협력 체제와 신뢰 형성이 우리 제조업의 우선 과제”라고 말했다.
물론 가장 바람직한 것은 중소기업이 스스로의 힘으로 확실한 기술력을 확보해 시장에서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금·인력의 한계로 실질적으로는 이같은 모습을 기대하기 힘들다. 따라서 중소제조업의 업그레이드는 중소제조업을 필요로 하는 대기업에 상당부분 의존할 수 밖에 없다.
이미 많은 분야에서 대·중소기업간 협력은 진행됐고 가속화했다. 그리고 일부에선 기존 하청관계에서 한 단계 발전한 전략적 제휴라는 모양세를 보이고 있다.
중소기업진흥공단 김홍경 이사장은 “이제 모든 결정은 대기업(세트업체)이 하고 중소기업(부품업체)은 무조건 따라가는 형태를 지양하고 ‘중소기업의 역량을 대기업의 경험으로 포장하는’ 네트워킹 협력시대를 열어야 한다”며 “대기업 입장에서도 이제 ‘홀로경영’을 피해 ‘함께경영’으로 경쟁력을 모색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특별기획팀>
◆세트-협력업체 협력 IT로 풀어야
세트업체와 협력업체가 서로 원하는 것을 수시로 전달하는 협력시스템이야말로 중소기업의 불필요한 수고를 줄이고 경쟁력을 높이는 데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LG전자는 지난해부터 본사와 협력업체를 하나로 묶는 ‘M2M(머신 투 머신) 통합’ 프로젝트를 추진해 최근 시범구축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완료했다. 이번 프로젝트로 본사의 주문 생산계획 입고정보 등이 협력회사 ERP로 전송되고 협력회사도 생산가능 규모·재고·실적정보 등을 실시간으로 본사에 전송된다. 아직 협력업체까지 확산하지는 않았지만 LG전자는 또 기술개발분야에서도 ‘글로벌 R&D 협업시스템’을 구축했다. 일단 자사 해외법인과 연구소를 중심으로 추진중이며 협력업체로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이 프로젝트는 특히 고객요구에서 협업개발, R&D 정보공유, 온라인교육 및 연구정보를 하나의 정보망으로 묶는 것이어서 협력 중소기업으로서는 모기업이 원하는 것을 가장 실질적으로 파악해 대응할 수 있는 체계를 갖게 된다.
LG전자 신문선 상무는 “본사와 협력업체가 규격·부품구성도(BOM)·물량정보 등을 공유하면 품질사고는 물론 각종 오류를 크게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전자도 본사와 100여개 중소 협력업체를 묶는 시범프로젝트를 진행중이다. 그간 전사적자원관리(ERP)시스템 도입 등 IT기술 도입에 앞장서온 삼성전자는 이제 핵심 협력업체들까지 도입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산자부 전자상거래지원과 박상희 사무관은 “정부의 중소기업 경쟁력강화 정책은 대기업과 함께 협력하는 형태로 추진해야 실질적 효과를 거둘 수 있다”며 “중소제조업의 업그레이드는 바로 대기업과 어떤 형태로 협력할 것인지, 무엇을 협력할 것인지, 대기업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에서 출발한다”고 강조했다.
일부 대기업의 이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 우리 산업계에는 모기업인 세트업체와 협력업체인 중소기업간 정보교류는 초보적인 수준이다. 특히 연구개발부문의 교류는 거의 없다시피하다.
이는 대기업과 중소기업간 수준차이에서도 비롯된 것이나 ‘대등한 협조관계’가 아닌 ‘하청관계’로서의 대·중소기업 관계가 가장 큰 요인으로 지적됐다.
윤종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입버릇처럼 “모회사(대기업)와 협력회사(중소기업)의 관계는 자전거의 앞·뒷바퀴와 같다. 앞에서 아무리 앞으로 달려가려 해도 뒤에서 못 따라 오면 헛일이다”라고 말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여건은 서로 다르나 기술수준을 같이 해야, 날로 치열해지고 있는 경쟁환경에서 공존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김영수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 회장은 “기술, 자금, 인력, 판매 등 중소기업들이 현장에서 겪는 애로들을 적극 경청하고 ‘상생의 정신’으로 문제해결에 나설 때 대·중소기업 모두 발전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 회장은 “특히 대·중소기업간 협력에서 불필요한 요소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단순 하청계열관계인 수직적 관계보다는 개방적 수평적 관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한 발 더 나간다면 대기업이 중소기업에 대한 경영과 기술지도를 통해 자금과 판로지원, 공동기술개발 등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협력업체의 경쟁력을 강화시켜 주는 것도 필요하다”고 김 회장은 덧붙였다.
<특별기획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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