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쇄기가 발명된 지 150년 후, 그 당시 생존했던 돈키호테의 이야기다.
“간단히 말해, 그는 책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땅거미가 질 때부터 동틀 때까지의 밤 시간을 오로지 독서만 하면서 보냈고, 새벽부터 어두워질 때까지의 낮 시간에도 독서만 하면서 보냈다. 이처럼 거의 잠을 자지 못하고 독서에만 열중한 탓으로 결국 그의 뇌는 빈사상태에 빠지게 되었으며, 마침내는 이성 능력마저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는 자신이 읽은 모든 것, 즉 마법, 싸움, 도전, 부상, 구애, 사랑, 고통, 그 밖의 온갖 터무니없는 상념들에 모든 정신을 빼앗겨 버렸다. 그는 상상의 세계에 너무 깊이 빠진 나머지 자신이 읽은 모든 환상적 요소들이 사실이라고 믿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곧 말을 타고 갑옷을 입고 모험을 찾아 세상을 돌아다니는 편력 기사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라만차의 돈키호테)
인쇄술로 만들어진 ‘책’이 인간에게 미친 힘의 한 단면이다. ‘현실보다 더 현실같은’ 세계를 인간은 책을 통해 경험하고 있다. 환상의 공간으로 통하는 길을 열어주었던 책은 수백년의 시간 속에서 현실 세계의 일부가 되었다. 하지만, 인간은 ‘사이버 공간’ 또는 ‘온라인 게임세계’를 통해 또 다른 가상세계를 경험하고 있다.
“게임이 뭐길래, 86시간 몰두한 20대 숨져”. 이런 기사는 이제 더 이상 놀랍지도 않다. PC방에서 며칠 밤을 새우면서 인터넷 게임을 하다 쓰러졌다는 이야기인데 컵라면 등으로 끼니를 해결하면서 며칠동안 10분도 자지 않고 게임을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가상의 게임세계가 현실의 인간 행동을 통제하는 강한 힘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런 힘의 정체는 무엇일까. 직장에서 일을 하다 죽으면 과로사라면서 나름대로 의미를 붙이는데, 게임세계의 몰입은 허망하기만 해보인다.
그러나 이제 가상이라고만 믿었던 사이버 세계는 점점 현실이 돼가고 있다. 컴퓨터 게임공간에서 무기와 갑옷을 도둑맞았다는 신고가 접수되어 게임상의 무기를 훔친 10대가 통신상 절도 혐의로 불구속 입건되었다는 식의 기사가 흘러 넘친다. 사이버 공간의 가상 물건을 훔치는 것이 현실세계의 범죄가 되는 상황이다.
이뿐 아니라 PC방에서 무기를 얻기 위해 폭력을 휘두르거나 살인까지 저질렀다는 보도도 있다. 사이버 공간에서의 전투가 현실세계에서 재현되는 것처럼 보인다. 일년에 수만건씩 발생하는 사이버 범죄의 대부분이 사이버 공간 상의 절도와 해킹, 또 사기사건이다. 현실세계의 범죄를 막기에도 역부족인 경찰력이 이제 사이버 세상의 문제까지 다루어야 하는 실정이다. 가상세계가 현실세계를 침범하고 있는 것이다. 가상 세계를 현실처럼 된 것은 ‘꿈은 이루어진다(?)’를 또 다르게 이루었다고 기뻐해야할 지 고민이다.
사이버 세상이 제2의 생활 공간이 되었다고 하지만 가상과 현실은 구분되기 보다는 어정쩡하게 결합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이버 범죄, 온라인 보드게임, 아이템 거래, 사이버 윤리, 사이버 문화 등의 문제는 바로 가상과 현실의 와중에서 혼란스러워 하는 우리의 문제가 된 것이다.
가상 세계는 현실의 일부는 아니지만 ‘거기에 있기때문에’ 현실의 일부가 된다. 인간이 단지 ‘실재한다’고 믿기에 따라 ‘있는’ 세계다.
가상세계는 인간의 심리적 경험의 표현이자 심리 현상이다. 생각으로는 실재하지만 물리적으로는 실재하지 않기 때문에 현실세계의 혼란이 발생한다.
소설과 영화·연극이 주는 환상과 가상의 경험은 현실 세계의 삶의 고통을 승화시켜주는 중요한 기제였다. 그러나 인터넷으로 대변되는 사이버 공간의 등장은 인간이 환상의 세계로 들어가는 팬터지의 상상에 현실적인 생명을 불어 넣었다. 이제 우리는 현실과 가상을 구분할 수 없고 현실과 가상의 경계선에서 살 수 밖에 없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황상민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 swhang@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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