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표준전쟁과 한국의 선택

 디지털TV 방송방식과 관련한 지루한 논란이 계속되고 또 증폭되고 있다. 미국식이냐, 유럽식이냐 하는 방송방식 논쟁은 근본적으로 방송계의 이해관계에서 비롯됐다. 일반적으로 고선명(HD)급 해상도를 추구하는 미국식이 절반정도의 해상도(SD)급까지 지원하는 유럽식에 비해 투자비가 많이든다. 수년전 논란의 와중에 정통부는 과감히 미국식을 선택했고 이에따라 디지털방송 일정이 진행돼왔다.

 한때 불붙다 사그라진 논쟁의 불씨가 재차 지펴진 것은 이동수신의 효율성이 계기가 됐다. 유럽식은 이동수신에도 효과적인 반면 미국식은 그렇지 않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반면 유럽식은 화려함과 고해상도를 요구하는 멀티미디어시대에 걸맞지 않으며 이동수신용으로는 위성DMB가 더 적절하다는 반박이다. 방송위가 이 논쟁의 한가운데로 뛰어들어 표준선택의 재고여지를 남겼고 이는 디지털방송 일정에까지 영향을 미칠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방송위와 정통부간에는 일촉즉발의 전운이 감돈다.

 그러나 이를 지켜보는 산업계의 입장은 착잡하기만 하다. 산업계의 입장이나 시각은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표준을 바라보는 산업계의 시각과 입장은 지금의 논쟁과는 거리가 있다. 표준전쟁을 얘기할 때는 마쓰시타와 소니간 녹화기(VCR) 전쟁을 빼놓을 수 없다. 표준의 잣대를 가늠하는 거울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당시 기술적으로는 마쓰시타의 베타방식이 소니의 VHS방식보다 우위라는 평가였다. 그러나 베타방식은 시장을 선점한 VHS방식에 완패했다.

 기술적인 가치가 표준을 결정짓는 결정적인 요소는 아니다. 표준은 기술 그 자체보다는 오히려 시장과 힘의 논리에 의해 좌우되는 경향이 짙다. 실제로 표준은 기술뿐 아니라 거대한 시장과 힘을 보유한 미국과 유럽이 주도하고 있다. 미국과 유럽은 한동안 손을 맞잡고 글로벌스탠더드를 이끌어냈다. 하지만 지금은 서로 각자의 방식을 고집하며 힘대결을 펼치고 있다. 거대한 시장을 가진 중국도 뒤떨어진 기술력만 갖추면 조만간 세계표준을 주도할 위치에 합류할 것이다.

 문제는 한국의 선택이다. 한국은 이들 열강들의 시장에 의존해야하는 동시에 각축전의 틈바구니에 끼어있는 신세다. 한국의 표준은 기술적인 문제보다 사실은 이같은 국제정세를 더 고려해야하는 처지다. 어느쪽이 산업계에 실익이 될 것인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산업계는 때지난 방송방식 표준 그자체보다 산업계에대한 배려를 고대하고 있다. 일찌기 한국은 CDMA를 선택, 한강의 기적에 못지않는 성공신화를 거두지만 산업계는 정부의 CDMA정책에 대해서도 유감이 많다. 사실 한국이 CDMA를 선택한 것은 큰 도박이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부는 당시 모든 자원과 관심을 오로지 CDMA 한곳에만 집중했다. 정부가 오로지 CDMA만 부르짖으며 GSM을 외면했을때 산업계에서는 GSM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거대 시장을 놓칠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 GSM은 CDMA를 능가하는 수출상품이 되었다.

 유럽식 디지털TV도 매한가지다. 정부가 미국식에만 골몰하고 있을때 기업들은 유럽시장에도 눈독을 들였다. 휴맥스와 같은 유럽방식 셋톱박스업체가 탄생한것은 순전히 민간의 노력이었다.

 기업들은 말한다. “정부가 CDMA나 HDTV에 쏟은 관심의 10분의 1만이라도 GSM이나 유럽식 디지털TV에 기울였다면….” 우리의 시장은 한국이 아니다. 그렇다고 미국만도, 유럽만도, 중국만도 아니다. 이들 모두다.

 정부가 하나의 국가표준을 선택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또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도 중요하다. 하지만 이것이 산업과 시장의 다양성을 해쳐서는 안된다.

 우리에게 실익이되는 표준선택에 못지 않게 세계시장을 고려한 유연하고 다양한 산업정책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유성호·디지털산업부장 shyu@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