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고네의 편지](22)미국여행

 지금까지 줄거리

 아키라의 자살에 관한 의혹을 풀기 위해 에이지와 히로코는 급기야 에리카를 찾아 미국으로 간다. 에리카와 결혼한 것으로 생각되는 브랜다이스대학의 미국인 교수를 찾아가는데….

 

1999년 6월 17일

매사추세츠 보스턴

 매사추세츠의 주도 보스턴은 그리 크지 않다. 다만 주변의 위성도시를 모두 합한 것을 보스턴으로 부를 뿐이다. 동쪽으로 대서양을 접한 항구인 보스턴시는 서쪽으로 캠브리지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데 이 경계를 만드는 것이 찰스강이다. 에이지 일행이 든 호텔은 찰스강의 보스턴변에 있는 고색창연한 백베이 지역이다. 시차에 시달리는 에이지와 히로코를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든 넷은 아침 일찍 일어나 브랜다이스대학으로 향한다. 보스턴과 캠브리지를 잇는 다리 중의 하나인 하버드브리지에 들어서니 강 너머로 회색의 건물들이 마치 그리스의 사원들처럼 퍼져 있다. MIT다.

 “아키라도 나도 MIT에 진학하여 박사학위를 받고 싶었는데….” 차창으로 MIT 건물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에이지가 말문을 연다. “하지만 우리 단카이(團壞)세대는 제대로 공부를 할 수 없었어.” 단카이세대란 일본 전후에 1947년에서 49년을 중심으로 태어난 소위 베이비붐 세대다. 이 세대는 성장하여 반미, 반보수 사회운동의 중심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요. 저도 이쪽으로 유학을 하고 싶었어요. 이 동네에는 워낙 대학이 많잖아요? 캠브리지에 MIT와 하버드, 보스턴에 보스턴대학, 웨즐리에 웨즐리대학… 그 꿈들은 사라지고 이제 이렇게 기묘한 사연을 가지고 보스턴엘 오는군요.” 다즈코의 말이다.

 MIT를 통과하여 매사추세츠 애비뉴를 따라 10분을 채 못가 하버드대학이 자리잡은 하버드 스퀘어가 나오고 여기서 방향을 남쪽으로 틀어 한 20분 달리니 브랜다이스대학이다. 학기가 끝나가는 무렵이라 그런지 차분하게 아름다운 캠퍼스에 인적이 많지 않다. 인포메이션 센터를 찾아가 스티브 코헨 교수를 찾아 왔다 하니 안내인은 앞에 놓인 컴퓨터에 이름을 입력해보고 Oh, boy! We have three Steve Cohens. Steve B Cohen, Steve H Cohen, Steve S Cohen. Which one do you want? 한다. 금방 이해가 안되는 에이지를 제쳐놓고 고야노가 나서 이야기한다. 코헨이라는 성 그리고 스티브라는 남자이름 모두 유태인에게는 가장 많은 이름이라는 것이다. 소속 학과도 모르는 상태에서 누구라고 말할 수 없다. 이때 다즈코가 기지를 발휘한다. 혹시 배우자 이름이 일본인인 사람은 없나요? 이 말에 컴퓨터 마우스를 클릭하며 배우자 이름을 중얼거린다. 데비, 수잰, 에리카. Oh, Erika. I know her! 인포메이션 센터의 안내원은 통통한 얼굴이 흥분하여 콧잔등에 땀이 송송 맺히는데 우유에 불려 놓은 아기인형 같다.

 지나치게 친절한 안내원에 따르면 스티브 S 코헨 교수는 생물학이 전공이고 오늘은 오전에 학생들과 개인면담을 허락하는 오피스 아워(office hour)를 갖는 일정이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10시반 이후에 연구실로 가면 자리를 지키고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아직 한 시간이 남아 있다. 학생들이 모이는 쿠프(Coop)에 가서 책방도 구경하고 커피도 마시며 한 시간을 죽이고 코헨 교수가 있는 연구동의 3층으로 올라가니 카펫이 깔린 건물이 말끔하고 조용하다. 창고 같은 일본대학의 연구실에 비하면 호텔 수준이다.

 Professor Stephen S Cohen. 풀네임이 쓰여 있는 문에 노크를 하니 “Come in” 하며 우렁찬 목소리가 들린다. 쭈삣 쭈삣하며 네 사람의 일본인이 들어가는 광경은 연구동의 모습과 전혀 안 어울린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널따란 사무실의 두 벽에 책이 빽빽이 꽂혀 있고 아예 작은 사다리까지 걸쳐 있다. 한가운데의 책상에서 일어나는 인물은 반백의 머리에 반백의 수염이 이어져 나이가 구별이 안된다. 넷 중 한 사람도 입을 열지 못하고 머뭇거리는데 코헨 교수는 유창한 일본말로 “요오코소 브랜다이스에(브랜다이스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하더니 거침없이 일본말로 지껄인다. 파격적인 환영과 언어장벽 해소에 다섯 사람은 오랜 지기처럼 편안해진다. 인포메이션 센터에서 일본인이 넷 방문할 것이라는 연락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하루 종일 마셔도 다 못 마실 크기의 머그에 블랙커피를 한잔씩 나눠 준 코헨이 묻는다.

 “사실은 에리카상을 좀 만나러 왔습니다.”

 에이지의 대답에 커피를 쏟을 정도로 코헨이 긴장하며 “우리 집사람에게 무슨 일이십니까” 하며 비교적 정중하며 거리가 있는 어조로 묻는다. 초기의 미소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이 얼굴을 보며 히로코는 코헨이 에리카를 무척 사랑한다는 것 그래서 심한 경계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서양인의 입에서 나온 ‘우리 집사람’이라는 표현이 너무 생경하게 들린다.

 에이지도 코헨의 경계심을 느꼈는지 부드럽게 대답한다.

 “네, 저는 대학시절 모리 에리카상하고 친구로 지냈습니다. 그때 늘 같이 지내던… 그렇니까….” 여기서 에이지는 아키라에 대하여 어떻게 할지 모르고 망설인다.

 “아키라상에 관한 일입니까?” 코헨이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다. 이 말에 넷은 모두 놀란다. “아니 아키라상을 아세요?”

 “참으로 애석한 죽음입니다.” 코헨이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아니 아키라의 죽음에 관해서도 알다니…. 에리카가 먼 동화 속의 나라에라도 살듯이 생각한 자신의 잠재의식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었는지 에이지는 갑자기 통렬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여기를 좀더 빨리 왔어야 했어…. 에리카에 대한 미안함이 가슴을 찌른다.

 에이지의 마음 속을 들여다보듯 코헨이 말을 잇는다.

 “저는 대학원 시절 그러니까 1970년에 일본의 리화학연구소(理化學硏究所)에 가서 일년간 연구를 했습니다. 그 후로 생물학을 연구하면서도 일본에 관하여 늘 공부를 하며 거의 매년 갔어요. 지금도 늘 일본신문을 보며 여기 앉아서도 일본에서 일어나는 일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랬구나. 이때 에이지의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다. 리화학연구소라면 일본을 대표하는 이학계 연구소이고 에리카가 대학을 졸업하고 여기에 들어갔다고 자랑하던 기억이 난다.

 “그러면 에리카상을 거기서 만났습니까?”

 “네, 그렇지요. 하지만 그때는 제가 일본말이 안되고 해서 거의 말은 나눈 적도 없어요.”

 “그러면 에리카상도 아키라상의 죽음에 관하여 알고 계시겠네요?” 듣고만 있기 거북한지 다즈코가 묻는다.

 “그럼요. 사실은 내가 말해 주었습니다. 집사람은 일본에 관하여 상심한 것이 많아 오히려 나보다 일본에 관심이 없어요. 하지만 후지사와 아키라상의 불행한 죽음에 관한 기사를 보고 나로서는 말해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집사람은 지금 큰 충격에 빠져 있습니다.”

  코헨의 말 속에는 본인이 아키라와 에리카의 관계를 소상히 알고 있다는 느낌이 묻혀 있다. 그래도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히로코가 묻는다.

 “그러면 코헨 교수님은 아키라상과 에리카상이 부부였다는 것은 잘 아시겠네요.”

 “물론입니다. 그것이 우리 둘이 같이 되는 운명의 출발점이니까요.”

 “무슨 말씀이신지….”

 “글쎄요. 우리 집사람의 허락 없이 거기까지 말할 수는 없지요. 아무튼 여기까지 오셨으니 한번 만나셔야겠지요.” 하더니 네 사람의 관계를 묻는다.

 “그러면 네분 다 우리 집사람을 만나시겠습니까?” 하는데 넷이 모두 에리카를 만날 이유가 없다는 메시지가 분명하게 전달된다.

 이때 영리한 다즈코가 끼어 든다.

 “아녜요. 우리 남편이랑 히로코상은 같이 보스턴이며 케이프코드 등을 둘러보기로 했어요. 그리고 우리 세 사람은 어차피 에리카상을 모르는 사이니까요.”

 이 말에 코헨은 안심한 듯 끄덕이며 전화기를 든다.

 “Hey, honey, guess who is here” 하며 영어로 속삭이는데 얼굴이 환해지며 인자한 얼굴에 사랑이 그득하다. 이 광경을 보는 네 사람에게 중년의 사랑이 주는 편안한과 부드러움이 찡하게 느껴진다. 일본인 넷이 방문했다는 이야기를 마친 후 수화기를 에이지에게 건넨다.

 “모시모시, 다나카데스. 시바라쿠 데스네(오랜만입니다)”

 “도모… 고부사타시데 오리마스(예… 정말 오랜만입니다)” 에리카는 공경어를 써서 인사를 한다. 삼십년전 듣던 오보에같이 감미로운 목소리에 변함이 없다. 다만 세월이 가져다 준 관록이 들어 있을 뿐이다.

sjroh@alum.mit.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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