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7년 5월, IBM의 ‘딥 블루(deep blue)’ 슈퍼컴퓨터가 세계 체스 챔피언인 게리 카스파로프와의 대결에서 승리한 사건은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다.
‘인간’과 ‘컴퓨터’간에 우위성 논쟁으로 빗대어졌던 당시 그 사건은 카스파로프가 85년 22살의 나이로 사상 최연소 세계 챔피언으로 등극한 데다 그때까지 체스 역사상 최고의 고수라고 여겨지고 있던 터라 더욱 놀라운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당시 ‘딥 블루’는 체스에 특화된 가속기를 이용해 체스 경기에 있어서 인간 두뇌의 30분의1 정도의 성능을 냈던 것으로 알려졌으며, 일반적인 연산능력은 그때 대부분의 중형 슈퍼컴퓨터들과 마찬가지로 ‘도마뱀보다는, 높고 쥐보다는 낮은 정도’의 지능 수준였다.
그러나 지난해 말 발표된 IBM의 ‘아스키 퍼플’ 슈퍼컴퓨터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인간 두뇌의 속도를 따라잡음으로써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IBM 계약 당사자인 미국 에너지성 산하의 로렌스리버모어연구소 측에서 ‘마치 다른 사람들은 돋보기를 가지고 있는데 우리들은 전자현미경을 갖게 된 것 같다’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20세기 중반 이후 전자회로 소자의 집적률 향상 속도에 대한 경험 법칙인 ‘무어의 법칙(moore’s law)’이 예측한 대로 반도체의 집적도는 18개월마다 2배 정도씩 향상돼 왔고, 반도체의 성능에 직접 영향을 받는 컴퓨터의 최고 성능도 20세기말까지는 이 법칙이 지켜져 왔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와서 슈퍼컴퓨터의 성능 향상속도는 ‘무어의 법칙’을 훨씬 뛰어 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대표적인 시스템의 성능을 비교해 보면, 46년에 설치된 최초의 전자식 범용 컴퓨터 에니악(ENIAC)의 성능을 기준으로 할 때 2000년에 설치된 미국 ‘아스키 화이트(ASCI white)’ 시스템은 약 25억배, 2002년에 설치된 일본 ‘어스 시뮬레이터(earth simulator)’ 시스템은 약 80억배, 2004년에 설치 예정인 ‘아스키 퍼플’ 시스템은 약 200억배로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2005 이후에는 700억배 이상의 성능을 구현하는 슈퍼컴퓨터의 출현을 예고하고 있다.
현재 전 세계 슈퍼컴퓨터 성능 1위인 일본 ‘어스 시뮬레이터’의 경우 2002년 11월 기준 3만5860기가플롭스의 성능을 구현하고 있다. 3337기가플롭스로 2위를 차지하고 있는 미국 기상청은 ‘자존심’을 다쳤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심각한 반응을 보였다. 미국 기상청은 이미 오는 2009년까지 100테라플롭스로 성능확장 계획을 세웠고, 영국 기상청 역시 현재 1.55테라플롭스 수준의 슈퍼컴퓨터를 2005년까지 30테라플롭스로 확장할 예정이다.
이처럼 이미 전 세계 슈퍼컴퓨터 시장은 ‘테라플롭스’ 시대로 접어들었다. 지난해 11월 조사된 슈퍼컴퓨터 톱500 리스트(톱500닷오아르지)에서 보면 전세계 슈퍼컴퓨터 10위권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린팩 기준으로 최소 3.2테라플롭스는 넘어야 한다.
이같은 슈퍼컴퓨터 성능의 급속한 향상은 그 동안 전통적으로 슈퍼컴퓨터로 계산해온 문제들의 정밀도와 정확도를 높여야 한다는 필요성과 소위 ‘그랜드 챌린지 문제들(grand challenge problems)’처럼 인류가 그 동안 풀지 못했던 문제들을 풀기 위해 슈퍼컴퓨터로 대규모의 복잡한 연산을 처리하고자 하는 새로운 시도들에 의해서 요구되었고, 그런 요구를 기술적으로 수용하면서도 저비용·고효율의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는 다양한 기술의 개발에서 비롯된 현상이다.
올해 국내 슈퍼컴퓨터 시장에서 가장 큰 이슈로 부각될 것으로 예견되는 기상청의 경우 오는 2006년께 10테라플롭스 구현을 목표로 하고 있다. 기상청 외에도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이 지난 2001년 도입한 슈퍼컴퓨터 3호기를 내년 초 4.2테라플롭스까지 확장할 계획을 염두에 두면 우리나라도 테라플롭스시대로 접어든 선진 슈퍼컴 대열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신혜선기자 shinhs@etnews.co.kr>
■세계 슈퍼컴 프로젝트 진행 현황
페타플롭스를 향한 슈퍼컴퓨터 진영의 걸음은 계속된다.
무어의 법칙을 넘어선 성능 향상 요구, 제작 및 유지 비용의 획기적인 절감 대책 요구를 만족하기 위해 IBM이 진행중인 슈퍼컴퓨터 제작 프로젝트 중의 하나가 ‘블루 진(blue gene)’ 프로젝트다. 2007년에 1페타플롭스를 목표로 추진중인 이 프로젝트는 저전력 프로세서 칩에 다중 CPU를 구현해 프로세서 카드 단위로 패키징한 후, 노드보드 단위로 쌓아올린 수십·수백대의 캐비닛을 고속 스위치로 연결하는 구조의 슈퍼컴퓨터를 제작하고자 하는 것.
미국 에너지성에 공급하기로 한 ‘블루진/엘’ 슈퍼컴퓨터는 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실제 시스템을 제작하는 사례다.
이에 앞서 구축될 ‘블루 플래닛(blue planet)’ 프로젝트는 미국의 국립에너지과학연구전산원(NERSC)과 IBM의 공동 프로젝트로서 오는 2005년 말까지 IBM 파워5 프로세서 기반의 가상 벡터 시스템을 초고속 네트워크로로 연결해 160테라플롭스의 슈퍼컴퓨터를 만들자는 프로젝트다. 이 프로젝트는 일본의 ‘어스 시뮬레이터’를 겨냥, 실제 성능은 2배 이상 향상시키되 비용을 반으로 줄이는 저비용 고성능의 아키텍처 구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특히 이 프로젝트는 IBM 파워5 기반 시스템의 고속 시스템 버스와 하드웨어 통신 링크를 통한 CPU 동기화 기능을 이용해 단일 CPU 구조의 파워5 칩 8개로 구성되는 노드에 ‘가상 벡터 아키텍처(ViVA:Virtual Vector Architecture)’ 기법’을 적용함으로써 마치 각 노드가 벡터 컴퓨터인 것처럼 동작하게 한다는 것이다.
또 크레이는 현재 X1 시스템의 후속 기종인 ‘크레이 X1e’ 시스템에 이어, 이미 진행 중인 ‘코드명 블랙윈도’에 제품을 기반으로 오는 2010년까지 페타플롭스 시스템을 개발한다는 계획을 밝혔다.
<신혜선 shinhs@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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