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러나는 美IT패권주의](상)노골적인 통상 압력

 미국의 IT패권주의가 거센 통상압력으로 밀려오고 있다. 자국 기업의 이익이 걸린 일이라면 자신만의 잣대를 서슴없이 들이댄다. 하이닉스 상계관세가 그렇고 무선인터넷플랫폼 위피 처리가 그렇다. 상황이 이런데도 우리 정부는 치밀하고 정교한 사전대응은커녕 허둥대다가 당하고 있다. 국내 IT업계에 밀어닥치고 있는 미국의 일방통행식 압력과 우리 정부, 업계의 대응 및 전망을 긴급 점검한다. 편집자  

 지난달 31일 워싱턴DC 미국 무역대표부(USTR) 사무실. 수십명의 기자들 앞에 선 로버트 B 졸릭 무역대표는 입을 뗐다. 그는 “통신, 컴퓨터 관련 분야를 비롯해 금융·보험, 교육, 환경, 택배 등 미국 서비스 시장을 모두 개방한다”고 밝혔다.

 발표의 표면적 의미와는 달리 미국이 그동안 추진해온 경제패권주의에 하나의 커다란 매듭이 지어지는 순간이었다.

 졸릭 대표가 언급한 내용은 총 120페이지에 이르는 USTR의 보고서에 잘 나타나 있다. 미국이 통신, 컴퓨터, 케이블TV 등의 첨단서비스를 비롯해 금융·보험, 교육, 환경 등의 서비스 시장을 완전히 개방하겠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들 서비스 부문에 대해 다른 나라에 “우리가 이만큼 개방하니 너희도 이만큼은 개방해라”는 강압의 목소리를 낸 것에 다름아니었다.

 USTR의 보고서가 갖는 의미는 곧바로 나타났다. 다음날인 1일, 미 상무부가 하이닉스반도체에 대해 고율의 53.37%의 상계관세를 부과키로 했다고 밝혔다. 대책을 강구하는 와중에도 우리나라 정부 및 IT업계 관계자들은 미국측의 강력한 드라이브에 나타난 미국의 비정함(?)을 실감하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측 전문가들은 “정부와 업계가 미국에 대해 상식을 벗어난 조치이며 통상마찰을 우려하고 있는 것은 정말 순진한 생각”이라고 말한다. 이미 미국 정부와 업계가 뭉쳐 작정하고 하이닉스 죽이기에 나선 상황이기에 우리 정부와 업계로선 방어수단이 별로 없다고 입을 모은다.

 사실 이번 하이닉스사태에서 보여준 미국의 행태는 우리나라 IT업계가 처음 겪는 일도 아니다. 가깝게는 국산 무선인터넷플랫폼 ‘위피(WIPI)’에 대한 미국측의 태도다. 우리 정부와 업계의 지적재산권에 대한 사전조사가 미흡한 측면도 있지만 위피건은 잘 나가는 국가에 대한 ‘딴죽’의 의미임이 어렵잖게 읽힌다. 브루(BREW)를 앞세워 세계 무선인터넷플랫폼 시장에 진출하고 싶어하는 퀄컴이 믿었던 한국의 배반에 분풀이하고 이를 미국정부가 뒷받침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미국내 일부 의원들이 또 결말도 나기 전에 이라크전 이후 이라크의 통신방식을 유럽의 GSM방식보다 CDMA방식으로 구축하자고 주장, 유럽과 갈등을 보이고 있다.

 이처럼 미국은 지난 9·11 이후 안보를 앞세운 패권주의의 보도를 휘두르고 있다. 가뜩이나 내리막을 걷고 있는 경제상황은 자국 업계 보호주의 여론에 외교논리까지 가세시키고 있다.

 세계인의 시선이 이라크로 모아지고 있는 동안 세계 경제패권을 장악하기 위한 미국의 움직임은 한발한발 진행되고 있다. 세계인들이 바그다드에 떨어지는 토마호크 미사일의 굉음에 몸서리를 치고 있는 동안에도 미국 정치인들과 경영자들은 주판알을 튕기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IT업계 전문가들은 ‘안보와 경제’ 두 가지 측면에서 진행되고 있는 미국의 패권주의가 분명 향후 세계 정치·경제를 비롯한 IT시장 질서에 엄청난 변화를 불러올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들은 “어쩌면 이라크전은 예고편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면서 “전쟁 이후 세계 IT업계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우리 IT업계만의 방안마련이 시급한 때”라고 지적하고 있다.

 <허의원기자 ewheo@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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