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다국적기업 지사장의 역할

◆양승욱 정보사회부장 swyang@etnews.co.kr

 사회 전반에 거세게 밀어닥치고 있는 변화의 물결은 IT분야도 예외는 아닌 듯싶다. 특히 전반적인 경기침체와 이에 따른 투자위축으로 상대적으로 가장 큰 타격을 받고 있는 IT산업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까지 더해지면서 변화의 속도가 더욱 빨라지고 있다.

 변화의 소용돌이에 세계 IT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다국적 IT기업들도 예외는 아니다. 이미 한국시장에서 수익이나 매력을 찾지 못한 기업들은 짐을 쌌거나 대대적인 인력구조조정 작업에 착수했다. 남아있는 기업도 새로운 변화에 대응키 위해 부산하다.

 이 같은 변화의 모습은 우선 세대교체에서 찾을 수 있다. 일부 대형업체를 제외하고 다국적 IT기업들 대부분이 최근 CEO를 교체했다. 그동안 우리나라 IT산업 발전의 한 축을 담당해 온 1세대들이 현장에서 물러나고 30·40대의 2세대들이 전면에 포진한 것이다. 우리나라에 IT산업이 태동하고 벌써 한세대가 흘러갔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다.

 그동안 다국적 IT기업을 이끌어가는 CEO에 대한 평가는 엇갈려왔다. 우리나라에 새로운 IT기술과 개념을 도입하는 최정예 역할을 해왔다는 긍정론에서 단순히 한국내에서 매출을 올리는 영업매니저로 폄하되기도 하는 부정론이 공존해왔다. 이제 새로운 패러다임을 이끌어가야 하는 CEO들에게는 1세대의 허물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다국적 IT기업의 CEO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21세기 정보화시대에 접어들면서 한국 IT시장의 위상은 크게 높아졌다. 한국시장이 전세계 시장의 1%라는 공식이 깨진 것도 2000년 들어서다. 적어도 2%에서 많게는 5%까지 한국지사가 전체 본사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급격히 높아지고 있다. 이미 다국적기업들의 한국지사 중 여럿은 직원수만 해도 수천여명에 이르고 매출도 1조원이 넘어서 외형적으로만 본다면 국내 100대 기업에 드는 수준까지 이르고 있다. 이 같은 높아진 위상에 걸맞게 본사가 한국의 IT산업에 무엇을 기여했는가를 새롭게 경영을 맡은 CEO들은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다국적기업들이 현지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해왔다고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매출을 올리기 위한 마케팅수단일 뿐이다. 과거 다국적기업의 CEO들이 수많은 공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다국적기업의 한국영업매니저라는 부정적인 인식이 심어졌던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이제는 다국적기업 CEO들이 한국시장의 위상에 걸맞는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것이다.

 참여정부는 우리나라를 동북아 허브로 육성키 위해 다국적기업들을 한국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다양한 유인책을 마련해 놓고 있다. 특히 한국시장이 제3국을 대상으로 한 시장창출에 앞서 먼저 경험하는 테스트베드라는 것이 전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면 이것은 역으로 우리 사용자들이 위험을 고스란히 안게 된다는 의미다. 따라서 그 수준에 맞는 대가를 얻어내야 함은 당연하다.

 최근 HP 본사가 전세계적으로 한국을 포함해 7개국을 선정해 광고마케팅을 진행하거나, 지난해 EMC가 한국에 250억원 규모를 투자해 솔루션센터를 설립하고, 선이 조만간 한국에 아태지역을 포괄하는 웹서비스솔루션센터를 만드는 것 등은 한국시장의 중요성을 본사도 인정하는 대표적인 사례다.

 결국 한국지사도 다국적기업 가운데 하나의 지사지만 본사를 대상으로는 자국의 이해관계를 더 충족시키기 위해 다국의 지사들과 경쟁관계를 벌일 수밖에 없다. 여기서 각 지사 CEO의 적극적인 협상력이 발휘돼야 함은 물론이다. 새 CEO들이 다국적 IT기업 한국지사장의 모습이 과거 단순한 영업매니저에 불과하다는 오명을 씻을 수 있을지 그들의 행보를 주목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