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1년말 삼성전자는 중국 노트북PC 시장에 처녀 진출하면서 가격을 어떻게 책정해야 할지 고민을 거듭했다.
제품 품질에서는 세계적인 노트북 업체인 소니나 도시바 등에 못지 않다고 자평하고 있었지만 브랜드 인지도가 떨어지는 것이 현실이라고 판단, 이들 회사의 동급 제품보다는 15∼20% 낮은 수준으로 책정키로 했다.
그러나 이를 보고받은 삼성전자 윤종용 회장은 “그동안 막대한 투자를 통해 중국시장에 삼성전자의 고가 이미지를 심어놓았더니 당신들이 이를 훼손하려고 하느냐”며 “저가에 팔려거든 아예 사업을 하지 말라”고 불호령을 내렸다. 실무진은 불안감을 가지면서도 윤 회장의 지시에 따라 소니와 비슷한 가격대로 매겨 노트북PC를 중국시장에 출시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동급의 소니 제품 판매량을 단기간에 따라잡았으며 후속 제품도 호평을 받았다. 애니콜, 싱크마스터 등 그동안 중국시장에서 쌓아온 삼성전자의 고급 브랜드 이미지가 결국 삼성전자 노트북PC까지 제값을 받을 수 있게 한 셈이다.
브랜드가 기업, 더 나아가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시대에 접어들었다. 정보화, 표준화가 진전되면서 선발업체나 후발업체간 기술력 차이는 점차 무의미해지고 있다. 국내업체들이 지난 수십년간 강점이라고 생각했던 제품생산력과 가격경쟁력도 이제는 중국에 물려줘야 할 판이다. 대신에 브랜드는 가격을 좀더 받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기업 생존을 위한 필수조건이 됐다. 이제는 브랜드 가치가 있느냐에 따라 상품가치가 달라진다. 실제로 소비자들은 상품 자체보다는 상품에 붙어있는 브랜드, 그 상품을 만든 기업이 주는 이미지를 느끼기 위해 상품을 구매하는 패턴으로 바뀌고 있다.
브랜드는 상품가치를 끌어올리는 효과뿐만 아니라 기업가치를 높이는 데도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한다. 지난 99년말 코카콜라의 장부가치는 95억달러인데 비해 시장가치는 1440억달러에 이르고 있다. 브랜드 평가회사인 인터브랜드가 그 해 코카콜라 브랜드에 매긴 가치는 725억달러로 브랜드 가치가 거의 시장 가치의 절반에 해당하는 수치다. 지난 99년 한국존슨은 에프킬러로 유명한 삼성제약을 인수하면서 브랜드 가치로 297억원을 더 지불하기도 했다.
국내 기업들도 브랜드력을 키우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삼성전자는 회사 설립 30년이 지난 99년부터 글로벌마케팅실 산하에 브랜드그룹이라는 브랜드 관리조직을 두고 1년여간의 철저한 준비를 통해 브랜드 관리에 나섰다. 개별 제품 차원에서 관리되던 브랜드를 싱글마스터 브랜드로 재포지셔닝하고 2001년에는 일관된 브랜드 전략을 위해 전세계 70여개의 광고대행사를 FCB라는 단일 광고대행사로 교체했다. 또 전세계 50여개국에 브랜드 모니터링 시스템을 갖춰 실시간으로 브랜드 효과를 평가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으로 인터브랜드가 지난해 발표한 브랜드 가치 발표에서 삼성전자는 34위(83억달러)로 지난 2001년에 비해 순위로는 8계단 상승, 가치로는 30% 높아졌다.
MP3플레이어 전문업체인 아이리버는 대기업이 아니면서도 MP3CDP에서는 소니를 능가하는 브랜드력을 보유하고 있다. 미국의 소매점인 베스트바이에서는 소니보다도 더 고가에 판매되며 다른 경쟁업체보다도 항상 1, 2개월 먼저 신제품을 출시한다. 이러한 기술력도 아이리버의 브랜드를 높이는 데 기여했지만 아이리버는 구매층의 특성을 파악, 인터넷을 효과적인 홍보수단으로 활용한 점이 더욱 큰 효과를 발휘했다고 평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 많은 기업들은 실제의 모습보다도 브랜드가 취약한 경우가 더 많다. 인터브랜드, 경제주간지 비즈니스위크 등이 공동조사한 ‘2002 세계 100대 브랜드’에서 국내업체로는 유일하게 삼성전자만이 들어있다. 삼성전자는 지난 2001년에 비해 8계단 상승했지만 정작 삼성전자도 지난 98년까지는 순위안에 들지 못했다.
이는 대부분의 대기업이 CEO가 직접 브랜드를 관리하는 해외 선진기업과 달리 홍보나 광고조직의 가외의 업무로 치부하는 등 브랜드 관리가 취약하기 때문이다. 또 브랜드 정책을 수립하고 추진할 만한 전문인력의 부족도 국내 브랜드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에 따라 새 정부에서는 브랜드 전문인력을 양성할 수 있는 새로운 정책이 마련돼야 하며 기술지원에 치중하는 산업정책을 브랜드 육성분야로도 눈돌릴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특히 브랜드에 힘을 쏟기 어려운 중소기업의 현실을 반영, 브랜드 육성과 관련된 자금을 지원하고 인력을 제공하는 ‘브랜드 클리닉’사업도 제시된다. 또 브랜드 성공사례를 공유할 수 있도록 체계적인 데이터베이스 구축은 물론 기업들의 브랜드 경영 마인드를 심어주기 위한 브랜드 관련 수상제도도 확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설명이다. KOTRA가 72개국의 일반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한국의 국가 이미지를 조사한 바에 따르면 지난해 7월의 이미지 평점은 78.4로 월드컵이 열리기 전인 5월의 77.2보다 겨우 1.2포인트 높아졌다. 전세계를 뜨겁게 달구었던 월드컵 열기도 한국의 이미지를 겨우 1.2포인트를 끌어올리는 데 그쳤는데 한정된 예산 내에서 진행되는 기업의 브랜드 이미지 제고는 속도가 더욱 더딜 수밖에 없다.
선발업체들과 후발업체들의 출발선이 거의 동일해진 디지털시대에 접어든 지금, 국내업체들이 앞으로 어떻게 브랜드를 육성하느냐가 선발업체들을 추월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점에서 새 정부의 체계적인 브랜드 제고전략이 시급하다.
<유형준기자 hjyoo@etnews.co.kr>
도움말 주신 분
산업정책연구원장 신철호 원장, 삼성전자 글로벌마케팅실 박성수 상무, 김도균 과장, 아이리버 양덕준 사장, KOTRA 엄성필 해외조사팀장
많이 본 뉴스
-
1
국회, 계엄해제 결의안 통과....굳게 닫힌 국무회의실
-
2
尹 "계엄 선포 6시간만에 해제하겠다”
-
3
'尹 계엄 해제'에… 與 “국방부 장관 해임” 野 “즉시 하야”
-
4
尹, 6시간만에 계엄 해제…'탄핵·책임론' 뇌관으로
-
5
[계엄 후폭풍]대통령실 수석이상 일괄 사의
-
6
“딸과 서로 뺌 때려”...트럼프 교육부 장관 후보 '막장 교육'?
-
7
한총리 “국무위원 전원 사의 표명에 마지막 순간까지 국민 섬길것…내각 소임 다해달라”
-
8
[계엄 후폭풍]대통령실·내각 사의 표명…'정책 콘트롤타워' 부재
-
9
속보정부, 국무총리 주재로 내각 총사퇴 논의
-
10
국회 도착한 박지원 의원
브랜드 뉴스룸
×